실험극 '보자기' 뉴욕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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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그들은 중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국인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본인은 아니다. 그들은 중국인.일본인에 비해 확실히 잘생긴 민족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들' 은 바로 한국인이다. 그것도 이름난 중국계 미국인 연극연출가 핑총(54)이 그의 신작 '보자기' 에서 배우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다.

지난달 24일 뉴욕 맨해튼의 대표적인 실험극장인 라마마극장에서 관중이 객석 계단까지 꽉 메운 채 막이 오른 '보자기' (핑총 작.연출)는 이방인의 눈으로 본 한국인, 한국역사에 관한 실험극이다.

역사를 소재로, 그것도 외국인이 만들었다면 왜곡과 무지로 얼룩졌을 것으로 단정하기 쉽다.

하지만 핑총은 이런 오해와 불신을 깨뜨리고 오히려 이방인들의 한국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중국.일본에 비해 아직도 한국을 낯선 나라로 여기는 파란눈의 관객이건 한국 역사에 정통한 까만 머리의 관객이건 가릴 것 없이 모두 만족시킨 '깔끔한 '수작이었다.

핑총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해석을 나열하는 대신 마치 화두를 던지듯 몇개의 키워드를 제시해 관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단군신화를 잠시 언급한 후 16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한국역사를 풀어나간 이 작품에서 핑총이 주목한 키워드들은 '양반' '거북선' '보자기' '명성황후' '히로시마' '재일교포' '분단' 'DMZ' 등이다.

이 키워드들을 핑총은 무대 위에 놓인 긴 테이블의 양쪽 끝에 앉은 배우 에스터 채와 찰리 리가 주고받는 시적인 내레이션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마치 구슬을 꿰듯 장면들을 이어 자신의 눈으로 본 한국 역사를 관객 앞에 내놓았다.

줄거리 구조는 철저하게 무시했으며, 시간순서를 따르지도 않았다. 한국사에 대한 종합적이고 친절한 설명을 담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감(感)을 잡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그러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업을 경멸하는' 양반이나 한국에 대해 무지한 외국인들이 지도만 보고 금을 그은 분단에 얽힌 장면에서 관객들은 비아냥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자객에게 무방비 상태로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모습이 아름다운 인형 같았다 거나 설렘으로 분단 이후 34년 만에 동생을 만났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한 남자의 고백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훔쳤다.

공연관람을 위해 매사추세츠주에서 온 공연기획자 웬디 워츠는 "한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없지 않지만 단편적인 장면들은 모두 매우 흥미로웠다" 며 "장면과 장면 사이의 비어있는 부분이 오히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고 말했다.

또 "별다른 무대장치나 동작이 없는 단순한 작품이지만 스타일이 뛰어나고 대단히 힘있는 작품" 이라고 평가했다.

'보자기' 는 뉴욕 초연에 앞서 그 일부가 지난해 12월 31일 비무장지대에서 열렸던 'DMZ2000' 페스티벌을 통해 한국관객과 만난 바 있다. 영어로 진행된 이번 공연에 출연한 배우 세 명은 뉴욕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됐다. 한국인 스태프는 동작안무와 드라마투르기(연출조언)에만 참여했다. 연극이 열리고 있던 지난 2일.3일에는 '네이티브 스피커' 의 재미 소설가 이창래씨와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각각 출연자들과 토론시간을 갖기도 했다.

핑총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뉴욕 차이나 타운에서 자랐다. 1993년부터 일본.중국.베트남과 서구와의 관계를 다룬 역사 실험극을 연작으로 선보여왔다.

'보자기' 는 4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뉴욕 공연은 지난 5일 막을 내렸다.

뉴욕〓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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