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 파문’에서 배운다, 차별적 언어는 폭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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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용석 기자 parkys@joongang.co.kr]

“아니, 언론은 왜 양비론으로 접근하는 겁니까. 이번 파문의 본질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폭력의 수준입니다.”

부산에 사는 박모씨는 최근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루저 파문’에 관한 언론 보도가 맘에 안 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엔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건드려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그러들었는데, 신문 기사가 나와 다시 화가 치민다고 했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 : 패배자)’라는 한 여대생의 발언이 전파를 타면서 시작된 이번 파문으로 상처받은 마음은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냥 싫다고 했다면 개인 취향쯤으로 넘길 수 있지만 패배자라는 단정적인 표현이 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란 묘해서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선 얼마든지 화자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될 수 있다. 더구나 어떤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한 집단을 매도한다면 뒷감당이 어렵게 된다. 루저 파문의 1차적 책임을 져야 할 방송사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조정신청이 폭주하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무더기 소송사태가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외모는 물론 인종 등에 관한 차별적 언어를 걸러내 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공문을 보내왔다. 기사에 ‘살색’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인종차별적 성격이 강하다는 진정이 들어왔으니 시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중앙일보는 우리나라가 피부색과 인종이 다양한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 만큼 인종차별적 용어인 살색 대신 ‘살구색’으로 쓰자는 내부지침을 이미 정해놓았지만 부지불식간에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앞서 올해 8월엔 한 방송 광고문구에 살색이란 표현이 들어가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지자 살구색으로 표현을 바꾼 뒤 다시 방영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살색 말고도 인종차별적 표현은 또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코시안(kosian)’이란 표현이 자주 쓰인 적이 있었다. 코시안이란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 또는 아시아 이주노동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으로, 당사자들이 차별적 언어라며 거부감을 보임에 따라 다문화란 용어로 순화됐다. 그러나 이 말도 자신들을 범주화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 구분 지을 때엔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는 “다문화, 이리 좀 와 봐” “수업 뒤 다문화는 남아 있어”라는 말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깊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밖에 ‘꿀 먹은 벙어리’ ‘절름발이 행정’ 등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식의 표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TV드라마나 영화 속에선 학력·외모·국적 등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거침없이 사용되고 있어 미디어에 의한 차별 조장이 생각보다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루저 파문은 무책임한 차별적 언어의 사용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상에서도 특정 집단이나 사회적 약자를 깎아내리는 표현이 문제가 되곤 한다. 파급 영향이 큰 언론매체에선 고의성 여부와 관계없이 무서운 언어폭력이 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책임과 소수자 배려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언어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 모두를 루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서명수 고충처리인, 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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