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5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56) 새로운 시작

내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된 사실을 안 것은 1983년 6월말로 당시 나는 미국 출장중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대덕(大德)공학센터에서 이를 긴급히 팩스로 알려 주었다.

핵연료주식회사는 한전(韓電) 산하기관이므로 당연히 임명권자는 한전 사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임명 사실을 통보받기 전까지 당시 박정기(朴正基.65.국제육상연맹 집행이사) 한전 사장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결국 朴사장 윗선에서 나를 사장에 임명하기로 결정한 게 틀림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83년 4월 전두환(全斗煥.69)대통령이 대덕공학센터를 방문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통령 자신은 미국을 의식해 원자력 분야를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과학자들이 중수로(重水爐)핵연료 시제품(試製品)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사실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덕공학센터장 겸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음지에서 애쓴 우리 연구원들이 받아야 할 포상을 내가 대표로 받은 셈이었다.

나는 7월초 귀국하자마자 한전 朴사장을 만났다. 첫 인상이 매우 좋았다. 군출신(육사 14기)답게 다부져 보이면서도 왠지 넉넉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全대통령의 측근이며 한국중공업 사장을 지냈다는 정도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아무튼 그는 첫 대면임에도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악수를 청하며 "韓박사님에 대해 얘기는 많이 들었다" 며 "도대체 韓박사님이 주장하는 기술 자립 정신이 무엇인지 한번 듣고 싶다" 고 말했다.

나는 평소의 생각을 기탄없이 얘기했다. "우리는 한마디로 원자력 설계 능력이 없어 밤낮 외국 기술을 들여오기 바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 입맛에 맞는 발전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배를 설계할 줄 알아야 상선이든 군함이든 원하는 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배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

그는 중간중간 내 주장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내 소신을 얘기했다. "우리 과학자들은 매우 우수합니다. 제대로 훈련만 시킨다면 얼마든지 설계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또 설계 기술이야말로 뛰어난 인력 외에 별다른 자원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가 개발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입니다. 하루 빨리 설계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원자력 기술자립은 요원합니다. "

朴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나도 같은 생각' 이라고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러더니 "지금 말한 것을 좀더 자세히 정리해 일주일 안에 보고서로 제출해 달라" 고 내게 요구했다.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사업을 해 나가려면 한전측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朴사장이 나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핵연료주식회사로 돌아와 먼저 업무 파악에 나섰다. 원래 이 회사는 82년 11월에 한전이 설립, 김선창(金善昶.73.현대건설 고문)당시 한전 부사장이 초대 사장으로 잠시 재직했었다.

그러다가 불과 7개월만에 내가 2대 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기존의 회사 방침을 검토해 보니 내가 추진하려는 원자력 기술자립 방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이 그랬다. 첫째, 핵연료 설계는 외국에 맡긴다. 둘째, 한국이 어느 기술을 도입해야 할지는 외국의 원자력기관이 결정한다. 셋째, 핵연료 생산을 위해 외국 자본을 50% 유치한다는 등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같은 방침은 전적으로 관례에 따른 것이었지만 기술 자립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를 모두 백지화하고 새 틀을 짜기 시작했다.

한필순 전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