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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고 싶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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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04면

오바마 대통령이 14일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신아시아 정책을 밝히고 있다. 그는 “중국의 부상을 환영한다”면서도 “모든 나라는 개인의 인권과 종교적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며 중국 인권 문제를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도쿄 AP=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14일 도쿄 시내 산토리 홀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신아시아 정책구상을 발표했다. 그가 40분간 연설하는 동안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는 전날 밤 일본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일 외무성의 한 간부는 “미 측이 총기난사사건 추도식 때문에 방일 일정을 늦춘 탓도 있지만, 손님을 놔두고 일본을 떠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외교의전상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하토야마 정권 출범 이후 내연하는 미·일 갈등의 단면을 보여준 상황이었다.

14일 도쿄 산토리 홀의 오바마 선언

하지만 오바마는 1박2일의 도쿄 일정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특유의 힘있는 화술, 소탈한 이미지는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왕궁을 방문한 오바마의 모습은 적지 않은 감동을 남겼다. 현관 앞으로 마중 나온 아키히토(明仁) 일왕(일본선 천황) 내외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일왕 내외는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이 모습은 생중계로 일본 전역에 방송됐다. 48세의 오바마 대통령에게 76세인 일왕이 아버지뻘이기는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일왕에게 절하는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다. 회사원 이시카와 료코(48)는 “세계 최강국 대통령의 겸손하면서도 소탈한 모습에 미국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날 신아시아 정책 연설을 시작하면서 오바마는 어릴 적 일본과의 인연을 끄집어냈다. 그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가마쿠라(鎌倉)를 방문해 평화와 온화의 상징인 불상을 감상했다”며 “그때 머릿속에는 (불상보다) 녹차아이스크림밖에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청중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연설장에는 세계 유일의 피폭지인 히로시마·나가사키 시장은 물론 이름이 같다며 지난해 대선 당시 오바마 지지선언을 해준 오바마(小濱)시 시장,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여성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운 오키나와현 지사와 관련 도시 단체장들도 초청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이들을 일일이 챙겼다고 한다.

히로시마·나가사키 방문 의사 밝혀
일본인들이 오랜 숙원사업으로 추진해온 현직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나가사키 방문도 오바마 재임 기간에 실현될 전망이다. ‘핵 없는 세계’를 주창하고 있는 오바마는 전날 정상회담에서 “재임기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갈 수 있다면 내게는 크나큰 영광”이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방일 직전 NHK 인터뷰에선 “어릴 적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일본인을 접했다. 그들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수준, 훌륭한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치켜세웠다. 방일 전엔 주미 일본 대사관을 통해 “일본에 가면 고베 쇠고기와 참치를 먹고 싶다”며 일본 음식을 격찬했다.

오바마는 이날 연설 앞부분부터 자신과 아시아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 최초의 태평양 지역(하와이) 출신 대통령으로서, 이 중요한 지역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미국을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소개하면서, 엄청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태 지역과 미국의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강조했다. ‘미국과 아시아는 하나’라는 메시지다.

오바마는 각론으로 들어가선 일본과 중국 두 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APEC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표명했다. 오바마는 또 “과거 반세기에 걸친 미·일동맹 관계가 양국의 안전과 번영의 기초였다”며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할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했던 말을 인용했다. “대등하고 상호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불굴의 파트너 관계”라는 것이다. 오바마는 또 “한국과 일본·호주·태국·필리핀과의 동맹관계가 각국 발전에 기회를 제공했으며,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을 치르지만 아시아 안보에는 한 치의 문제도 없다”고 말했다.

“北도발에 위축되지 않을 것”
오바마는 이어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한·일 등 동맹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핵 억지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을 지칭해선 지역안정의 저해자로 규정한 뒤 당근과 채찍의 메시지를 동시에 보냈다.

오바마는 “북한은 대립과 도발의 길을 선택해왔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이제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협박에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북한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안보는 약화될 것”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반면 북핵 포기의 대가도 분명히 했다. “북한에 다른 미래를 줄 용의가 있다. 북한 젊은이들도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하겠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투자와 관광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다른 생활을 주게 될 것이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참여하고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론은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였다. 블룸버그 통신은 오바마가 이날 연설을 통해 “아시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외교 방침을 내비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이후 쇠퇴하고 있는 대(對)아시아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강하다.

오바마의 이런 행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치밀한 전략’이라며 경계감을 나타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4일 “전날 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미·일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대등한 관계’라고 말한 것은, 일본 측에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나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구축’이란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또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이 이를 ‘미국의 외압’으로 받아들일 경우 반미여론이 커질 것이라는 경계감 때문이었다. 일본 신문들은 이날 톱 기사 제목으로 ‘일·미동맹 강화를 위한 새로운 협의’ ‘일·미동맹 강화에 합의’ 등으로 보도해 갈등보다는 협력 분위기를 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자신이 주창하고 있는 ‘핵 없는 세계’에 일본의 강력한 협력을 약속받았다. ‘핵 없는 세계를 위한 미·일 공동선언’을 비롯해 지구온난화 대책, 에너지 협력관계에 관한 공동성명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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