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사랑의 원천, 야구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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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35면

저는 행복합니다. 지난해보다 올해가,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합니다. 사람이 행복을 부르고, 행복은 전염된다는 진리를 요즘에야 깨닫는 중입니다.

On Sunday 기획칼럼 ‘당신이 행복입니다’

지난 9월 잠실 경기를 치른 날이었습니다. 구단 버스에서 내리는데 어느 여성 팬이 다가와 갑자기 제게 큰절을 했습니다.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정말 고맙다”고 했습니다. KIA 타이거즈가 정규리그 1위 확정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슴에 멍울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선수단은 그저 야구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도 팬들은 조건 없이 야구를 사랑합니다. 그 마음을 너무 몰랐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분들께 더욱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KIA가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오르자 “어려운 요즘, 야구 보는 재미로 산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운 말씀입니다.

저는 평생 야구만 해 온 사람입니다. 1982년 OB 선수로 데뷔해 코치·감독을 거쳐 지금까지 28년째 프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야구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쉰 살이 돼서야 깨닫기 시작했지요. 야구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요. 야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요.

저는 프로 데뷔 후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 가족들은 인천에 있습니다. OB 선수 시절엔 대전과 서울, 쌍방울 코치 시절엔 전주에서 살았지요. 삼성 코치로 고향인 대구에서 4년을 지낸 뒤 2003년 SK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KIA로 오고 나서는 3년째 광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향과 말투가 다른 여러 분을 만나며 살았습니다. 처음엔 낯설어하셨던 분들도 차차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야구를 통해 교감한 것이지요. 올여름엔 어떤 분이 팬들의 응원 문구를 모은 큰 액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걸 감독실 한가운데 걸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분들의 사랑을 받고 행복했습니다.

한국시리즈 동안 제 이름을 불러 주시는 소리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광주에서, 인천에서, 서울에서 들은 환호성을 가슴 깊이 간직할 것입니다. 야구의 힘은, 스포츠의 매력은 사람을 통합하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올해는 600만 명 가까운 팬이 야구장을 찾아 주셨습니다. 10월 24일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KIA가 우승을 차지한 뒤 저는 단상에 올라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에게 “야구팬 여러분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상대편인 SK 관중석을 향해 고개 숙인 뒤 “KIA와 명승부를 펼친 SK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고 인사했습니다.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열렬히 응원해 준 KIA와 SK 팬들이 너무 고마워 꼭 예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올 시즌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제 행복은 계속 커집니다. 올겨울엔 제가 팬들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사회봉사를 하면서 여러분과 행복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만나는 분들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행복은 사람과 나눌수록 커진다는 사실을 팬들로부터 배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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