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남녀 따로없는 명절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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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 10여시간을 달려 갔다온 한 후배 남자기자는 6일 출근길에서 만난 기자에게 즐거운(?)푸념을 해댔다.

도착과 동시에 팔을 걷어붙인 채 부엌으로 달려간 아내와 달리 자신은 안방에서 2시간 동안 푹 자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마구 흔들어 깨우더라는 것이다.

"너는 TV나 신문도 안보니. 어느 여성단체에서 명절준비도 남녀가 함께 하자고 운동한다더라. 거 참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대신 해줘서 속이 다 시원하다. "

그러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어느 순간 사이좋은 '동지' 가 돼서 밤 까라, 전 부쳐라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노역을 당했다' 는 것이다.

시골 시댁을 다녀온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30여분 동안 분풀이를 해댔다. 뼈빠지게 일만 하느라 허리 펼 틈조차 없었지만 손끝 하나 까딱 않은 채 고스톱 치고 술 마시며 놀다 돌아오는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전화 말미 그 친구는 "그러고도 어떻게 부부가 인생의 즐거움과 고달픔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라 할 수 있냐" 며 목청을 높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이 지나갔다. 하지만 여성들, 특히 각 가정의 며느리들에게도 설날은 '명절' 이었을까.

내놓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명절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아픈 '명절 증후군' 을 앓는 여성들이 주변에 많다.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난 게 '죄' 인 걸 어떡하랴. 그러나 최근 들어 작은 '반란' 를 시도하는 여성들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표적 예가 설밑에 펴낸 한 50대 여성작가의 '제사를 거부한다' 는 책. 그녀는 제사가 "가부장적 권력유지에 이용되고 있다" 면서 이를 거부하겠다고 도발적 선언을 했다.

여성들에게 적잖은 공감을 불렀지만 그녀의 주장을 따르기엔 여전히 현실의 벽이 높고 단단한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해 한국여성민우회가 펴낸 '웃어라 명절, 명절과의 평등한 만남 2000' 이란 지침서는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남녀차별 없는 명절문화 조성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렀다.

지침서가 나오자마자 보고싶다는 여성들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지침서에는 ▶남녀가 함께 일하고 함께 쉬기▶명절 중 한번은 친정가족들과 함께 보내기▶여자도 차례에 참여하기 등은 마음만 바꿔먹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다.

즐거운 불평을 말하던 후배 남자기자는 말했다. "제가 조금만 일을 거드니 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그렇게 좋아질 수가 없었어요. "

문경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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