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고위급회담 합의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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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과 미국의 본격적인 관계 개선 출발점은 1992년 김용순(金容淳)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의 미국 뉴욕 방문이다.

김용순은 당시 아널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과 만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핵 사찰 수용을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지면서 IAEA는 93월 2월 북한에 핵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93년 3월 12일)로 북.미관계는 꼬여갔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핵 카드를 이용해 미국과 대화채널을 넓혀갔고, 94년 10월 ▶북핵 동결▶대북 경수로 발전소 제공▶양국 관계 정상화 추진을 내용으로 제네바 합의가 마련됐다.

이후 북한은 평양-워싱턴 연락사무소 개설과 대북 경제제재 해제 문제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고 주장하며 수시로 제네바 합의사항을 깰 것처럼 위협해왔다.

지난해 5월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의 평양 방문은 관계 개선의 전기가 됐다.

페리는 한.미.일 3국의 대북 권고안을 제시하고,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의 미국 방문을 초청했다.

지난해 9월에는 '이른바 'K-K라인' 으로 불리는 '카트먼-김계관의 베를린 회담에서 북한 미사일의 시험발사 유보(미사일 모라토리엄)에 합의했다.

28일 두 사람 사이의 4차회담에서는 고위급회담(차관급 이상)을 갖자는 원칙에 합의했다.

[북.미 회담 일지]

▶1994.10.21〓북.미 제네바 핵 합의문 채택

▶1995.1.31〓미, 연락사무소 부지조사단 방북

▶1996.4.20〓북.미 첫 미사일 회담(베를린)

▶1997.12.9〓4자회담 1차 본회담(제네바)

▶1998.11.16〓금창리 핵의혹시설 관련 북.미협상

▶1999.5.20〓미, 금창리 지하핵 의혹시설 현장조사

5.25〓페리 '대북정책'조정관 방북

9.12〓북, 미사일 시험'발사' 유보

12.15〓2000년도 미군 유해발굴 협상

▶2000.1.28〓워싱턴 고위급 회담 개최 합의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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