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당·시민단체·시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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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엊그제 경실련이 오는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함으로써 때이른 선거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지게 됐다. 경실련의 발표는 그것이 지닌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정치권.시민단체를 포함한 여러 주체들간에 뜨거운 찬반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경실련을 포함한 시민단체의 국회의원 후보 지명을 둘러싼 문제제기는 원칙적으로는 정당한 것이고 또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적 요구는 엄청나지만 기존의 정치권은 지난 1~2년간 정치개혁을 말로만 외쳤을 뿐 별다른 성과를 낳지 못했다.

특히 현재 각 정당의 움직임을 보면 정치개혁의 핵심 중 핵심인 국회의원 후보 지명의 결정권은 여전히 다수의 당원이나 시민들이 아닌 정당 보스의 손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은 이러한 정치권의 무기력증이 1차적인 요인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각종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정치권을 견제할 만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기에 이른 것도 요즘의 현실이다.

얼마 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회의에서 나타났던 바와 같이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영향력은 이제 전세계적인 추세며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낙선운동을 둘러싼 정치권과 시민단체간의 갈등 양상은 자칫 정치발전이라고 하는 본래의 목적보다 혼란만 가중시킬 가능성조차 생겨나고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을 또 하나의 사회적 갈등이 아닌 정치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관차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정당들이다. 정당들의 고질적인 폐쇄적 구조와 경직된 인물충원의 방식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정치 불신의 근본적인 요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정당들이 과감하고도 혁신적인 개혁과 개방을 이루지 못할 경우 이번과 같은 정당에 대한 도전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또한 확산될 것이다.

서유럽의 발달된 정당들도 이미 1970년대부터 시민단체나 대안적인 정당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던 경험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도전이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도전의 주체가 되는 시민단체의 역할이나 도전 방법에 있어서도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돼야 할 점은 전문성의 문제다.

2백99명의 국회의원들이 4년 동안 벌이는 다양한 활동을 일일이 추적하고 감시해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낙선대상 후보를 선정하는 일은 처음부터 경실련이라는 하나의 시민단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부패정치인부터 수준 낮은 국회의원들까지 모든 유형의 문제인물들을 골라내는 백화점식 전략보다 오히려 경실련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이를테면 경제정의의 실현에 가장 저항했던 국회의원들을 골라냈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명단이 작성됐을 것이다. 또한 참여민주사회를 지향하는 참여연대도 국회에서 민주적 절차를 가장 크게 훼손한 국회의원들의 명단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여러 시민단체들은 각각의 전문성에 기초한 보다 설득력 있는 낙선후보 명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문성을 높이는 길을 통해 여러 시민단체들간의 자연스런 경쟁을 유발하고 다양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강조돼야 하는 것은 정당과 시민단체의 변화의 궁극적인 열쇠는 시민들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나 시민의 참여 없는 정당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번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을 계기로 시민들 역시 방관자적 자세보다 적극적 참여로의 변화를 모색할 때다. 이것만이 정당.시민단체.시민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

장훈 <중앙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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