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대입 논술 문제·해설] 고려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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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문제

제도(制度)에 관한 겔렌과 아도르노의 주장을 밝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되, 반드시 예시문에 언급된 여러 제도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논술하시오'(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해 1천6백자 안팎). '

(가)제도는 인간의 생식과 보호, 생계 유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 안정된 권력이 된다.

제도는 본래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견뎌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찾아낸 형식이다.

제도 안에서 삶의 목적이 공동으로 추구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며 내적 삶의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제도는 우리가 항상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부담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정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제도는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며, 개인은 그 제도 안에 편입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은 사실상 사유재산이나 결혼과 같은 제도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행동양식으로 체험한다.

제도는 그 구성원이 바뀌는 것에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개인에게 의식되며, 개인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직업.관청.공장과 같은 제도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함께 일하는 형식들 안에서 지배가 형성되고 정신적인 교류가 이뤄지는, 이러한 형식들이 결국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지닌 제도가 되고, 이 제도가 개인에 대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체제 내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또 어떤 제도에 그 개인이 편입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개인의 행동을 비교적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 아널드 겔렌, <인간학적 연구>

(나)아도르노 :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제도로부터 비롯된 이 권력은 철학의 용어로 '타율적' 이라고 불립니다.

제도는 인간과 맞닥뜨려 있는 낯설고 위협적인 권력입니다.

당신은 불안정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와 같은 불행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여 제도의 권력을 용납하게 된 것은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가 변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엄청난 중압이 되어 개인을 말살하는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것이 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도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변경될 수도 있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겔렌 : 동감입니다. 가족.법.결혼.사유재산 등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제도나 경제는 역사상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언젠가 해체돼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계속 바뀌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이상으로 묻고 있습니다. "왜 겔렌은 제도를 옹호하느냐" 라고 말이죠.

아도르노 :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어떤 점에서는 제도를 옹호합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 해결의 열쇠는 인간을 지배하는 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겔렌 : 좋습니다. 어디 봅시다. 우리는 어쨌든 논쟁점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안전의 관점을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제도는 인간이 스스로 멸망할 수도 있는 것을 막고 인간이 서로 해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유는 제한되지요. 그러나 혁명가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 프리드리히 그렌츠, <아도르노의 철학> 중 'A 겔렌과 T 아도르노의 논쟁'

◇ 해설

제도(制度)가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고 삶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도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권력인가를 묻는 이번 논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논제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아널드 겔렌의 '인간학적 연구' 의 주장을 놓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겔렌이 토론하는 형식의 제시문을 준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번 입시에서 대학들의 논술출제 특징은 현대 고전을 제시문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고전에서 출제한 고려대의 논술문제 핵심은 이 두 사람이 제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를 우선 파악하는 것이다.

겔렌은 제도가 원래 결함이 많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로서 자연적 본성의 결과물이자 인간 삶을 확대시켜 주는 긍정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본다.

반면 아도르노는 인간을 위해 만든 제도가 더이상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협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제도를 인간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수험생들이 판단해야 할 것은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제도의 불가피성과 제도가 갖는 억압적 힘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적절하게 피해 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김창호 학술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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