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경의 행복한 책읽기] 볼프강 쉬벨부쉬 '철도여행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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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기차의 기적소리는 우리에게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아련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기차여행은 우리를 바쁘고 반복적인 일상의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낭만적인 여행의 대명사로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돼 있다.

그러나 증기기관차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철도여행의 역사는 바로 근대의 역사와 그 궤적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근대의 대표적인 운송수단인 철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문명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우리 삶의 풍경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일제 시대로부터 근현대사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온 철도는 식민지 시대의 온갖 전쟁물자들과 만주 이주민들.학도병들을 실어나르면서, 혹은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로 서울역의 새벽풍경을 바꿔놓으면서 산업화.근대화의 음과 양을 함께 해온 것이다.

기차여행이 우리의 마음 속에 낭만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철도보다 더 빠르고 편리한 운송수단들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철도여행의 역사' (궁리.박진희 옮김)에 따르면 철도여행이 시작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걷거나 말을 타고, 혹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풍경을 직접 '체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풍경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여행방식은 기차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여행자와 풍경 사이를 기차의 빠른 속도가 막아버린 것이다.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철도의 등장이 가져온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내적 체험양식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한 속도경쟁의 시대라고 말해지는 현대의 삶이 우리로부터 앗아간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은 기차의 속도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기차 속에서 우리는 기차의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어떤 풍경을 완상하기 위해 기차를 세울 수도 없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풍경과 섞여드는 것이 아니라 기차의 차창에 비치는 풍경을 무심히 스쳐 지날 뿐이다.

풍경은 기차의 차창 위로 떠오르는 그 순간 기차의 속도에 휩쓸려 익명의 풍경으로 증발해버린다.

우리는 이것을 대도시의 군중 속을 스쳐 지나가는 체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초기의 사람들에게 속도에 대한 멀미를 느끼게 했던 기차여행을 이제 아련한 낭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만큼 속도문명의 세계에 깊숙이 사로잡혀버린 때문일 것이다.

박혜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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