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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국가보안법 폐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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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노무현 대통령은 5일 "국민 주권과 인권 존중의 시대로 간다면 국가보안법 같은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MBC '시사매거진 2580' 프로그램에 출연,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면서 이같이 제안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입장을 차례로 밝힌 지 엿새 만에 나온 것으로, 헌법기관 간 유권해석상의 충돌로 비춰져 파장이 예상된다. 노 대통령은 "보안법이 위헌이다 아니다는 해석이 갈릴 수 있지만 악법일 수 있다"며 "법리적으로 자꾸 얘기할 게 아니라 지난날 보안법이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보안법은 대체로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압도적으로 많이 쓰여왔다"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탄압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최훈 기자

[뉴스 분석] 법리보다 과거사 청산에 무게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기 제안은 최근 과거사 규명 추진 등 일련의 '역사 정리' 흐름과 맥이 닿아있다는 게 노 대통령 주변의 해석이다. 보안법은 국가의 안보보다 독재정권을 안보한 측면이 많았고, 따라서 이 법 폐지를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힘을 받았던 열린우리당 다수 세력의 보안법 폐지론은 최근 김승규 법무부 장관의 '신중론'과 헌재 결정, 대법원 판결 등으로 다소 밀리는 형국이었다. 이해찬 총리조차 폐기보다는 개정 쪽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의 핵심 참모는 "사법부는 기관의 성격상 모든 문제를 법리적 입장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 않으냐"며 "대통령이 역사적 결단임을 부각해 입법부의 보안법 폐지론에 정치적인 힘을 실어줄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보안법 폐지 쪽으로 밀어붙여 친일.독재정권의 불법행위 규명을 당위성의 차원에서 현실상황으로 끌어내리고 싶었을 것이란 얘기다.

대통령이 사법부와의 정면충돌 논란을 무릅쓰고 직설적.공개적으로 폐지론을 주장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노 대통령의 다른 참모는 "과거와 달리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가 수용되기 어려운 당정 분리 구도와 권력 환경을 감안한 것"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대통령으로서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이석연 변호사는 "헌법 수호 의무를 지닌 대통령이 법률의 최종 해석권이 있는 헌재와 대법원에 반한 의사를 낸 것은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도 "사법부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김갑배 대한변협 법제이사는 "사법기관들이 보안법은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것은 개별 사안에 대한 위헌 여부 또는 범죄사실 구성 여부에 대한 판단일 뿐"이라며 "대통령이 법안 폐지 의견을 낸 것 자체가 위헌은 아니다"고 말했다.

청와대 측은 노 대통령이 보안법에 대해 사법부와 대립적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법안 제안권이 있는 행정부의 수반이 입법부를 염두에 두고 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데 사법부의 판단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북한은 노동당 규약 등에서 한국을 여전히 공산화 통일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일방적으로 북한을 반국가 단체에서 제외하는 게 타당하냐는 문제가 논란이 될 것 같다.

최훈.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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