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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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주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심하다" 면서 "특히 정치와 일부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개혁의 미흡함을 지적하는 민주화운동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는 언론보도에 대한 대통령의 단순한 역정 차원을 넘어선다.

특히 "세계가 한국의 경제회복을 기적으로 평가하는데 언론은 옷 로비만 갖고 7~8개월 동안 쓰고 있다" 고 한 대목에서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노골적인 불만을 읽을 수 있다.

비록 '일부' 라고는 하지만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언론이 그럴 리 없다 해도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 역시 심각한 문제다.

물론 많은 언론들은 대통령의 그같은 현실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같은 인식을 갖도록 만든 언론상황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현실인식도 문제지만 우리 언론에도 일단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문제의 옷 로비 사건에 언론들은 몇달을 두고 거의 매일 '도배질' 하듯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오죽하면 '한국에는 옷 로비 사건밖에 없느냐' 는 빈정거림이 해외에서 나돌 정도였다.

옷 사건은 실패한 로비였지만 문제가 된 것은 고관부인들의 도덕성이었다.

사실대로 고백하고 응분의 도덕적 책임을 졌더라면 한바탕 소동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증언과정에서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권력 핵심부에서 이를 축소.은폐함으로써 의혹을 더욱 키워왔다.

이를 추적하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언론의 생리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센세이셔널리즘에다 우리 특유의 '냄비언론' 이 가세하면서 여타 모든 이슈들이 가려져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지금도 개혁의 와중에 있다.

개혁의 목표와 과제들을 부단히 점검하고 이슈화해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옷 사건에 너무 치우침으로써 언론보도가 균형을 잃은 점은 부인키 어렵다.

국민의 관심을 지나치게 '정치화' 하고, 야권의 '흠집내기 정략' 과 맞물리면서 결과적으로 국론을 친(親)DJ와 반(反)DJ의 대결구도로 몰아간 것은 누가 봐도 유감스럽다.

옷 로비 보도가 개혁주체세력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히고 국민들의 개혁마인드를 흐려놓았다는 점에서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잡았다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이는 개혁주체의 자업자득이다.

언론의 '발목잡기' 주장은 개혁성과에 대한 '인색한' 보도자세에서도 연유한다.

외국 언론에서 DJ의 인기는 국내에선 낮고 바깥에서는 높다 해서 '내저외고(內低外高)' 로 표현되기도 한다.

잘 하는 것은 당연시하고, 잘못한 것만 질타하는 습성은 어디 언론뿐이랴. 하기야 '달리는 말에 채찍질' 이라지만 사실 우리 개혁의 경우 그럴 수만은 없다.

기득권세력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상황에서 지금까지 이만큼의 개혁도 엄청난 것이다.

따라서 '물이 이미 반컵이나 찼다' 는 전향적인 자세로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하고 그를 토대로 남은 개혁과제를 추진.설득해나가는 노력은 책임있는 언론일수록 필요하다.

왜 우리는 이것이 안되는가.

개혁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언론도 물론 있다.

비판하는 자유만큼 아직까지 책임이 안따르는 우리 언론 수준에도 문제는 없지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개혁추진주체에 있다.

공동여당은 지붕만 같을 뿐 특히 개혁에는 딴살림이다.

개혁에 일관된 마스터플랜이 없고, 추진과정에서 서로 모순되거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왔다갔다 하는 사례가 너무 잦다.

이러고서 언론보도만을 탓할 수는 없다.

소수여당으로 기득권과 거대야당에 맞서 국가적 개혁을 관철시키는 일은 DJ에게 주어진 업보(業報)다.

그럴수록 정치적 포용과 국민에 대한 꾸준한 설득, 그리고 언론과의 생산적 협력관계는 중요하다.

설령 총선에서 지더라도 소수여당으로 개혁을 이루어낼 때 우리의 민주역량과 DJ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더욱 빛이 난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의회는 으레 공화당이 다수가 되지 않는가.

'언론플레이' 로 상대방 흠집내기에 급급한 야당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

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야당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가지 않는 현실은 뭘 말하는가.

이는 정치의 황폐화요, 여야가 함께 죽는 길이다.

'미국의 세기' 를 주름잡은 대논객 월터 리프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만은 국가적 견지에서 적극 뒷받침했고, 야당 또한 개혁입법만은 초당적으로 속속 통과시켜주었다.

대안(代案)없는 질타와 흠집내기 위주의 '언론플레이' 가 판치는 우리 상황에서 이런 그릇 큰 야당과 대논객들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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