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대하소설] 568. 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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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3

그제서야 승희는 접견실을 휘둘러 보았다. 접견실은 음악당을 연상하리만치 분수 이상으로 넓었다. 학교 교실처럼 남향으로는 모두 창문을 배치했고, 그 창문으로부터 가을의 정갈한 햇살이 얼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탁자와 의자들을 세척하듯 스스럼없이 흘러들고 있었다. 수감자와 접견이 진행 중인 사람들은 그들을 포함해 불과 대여섯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인데, 접견실 전체는 건너편 벽 아래 앉은 사람의 형용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정작 죄수들은 좁은 공간에 수용하고 있는 걸 보면, 그 드넓은 면회실은 분명 허세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거짓은 그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 싫어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지금은 오히려 휑하니 넓은 공간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는 셈이었다. 대꾸는 않고 그녀는 반문했다.

"제가 왜 면회 왔는지 아세요?"

"글세…. 마땅히 갈 곳이 없어진 여자가 됐뿌렀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곤란한 질문 던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자기 허벅지는 피멍이 들도록 모질게 내려쳐도 차마 내 따귀만은 때릴 수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변씨말고 또 어디 있겠어요. "

"갇혀 있는 사람 데리고 희롱하는 거 아녀. 나 그런 사람 못돼. 여기서 나가면, 또 어떤 건달로 변하게 될지 그건 나도 장담 못해. 손버릇 고치는 거 손쉬운 일이 아니지. "

"결혼도 해보았고, 바닷가에 불쑥 나타나 무작정 횟집도 열어 보았고, 혼인신고 않았던 기둥서방도 두어 보았고, 먹물 먹었다는 남자가 나타나자 당장 바람이 나서 그 사람 따라 장돌뱅이 생활도 해보았고, 밀수꾼 따라 중국 드나들며 하꼬비 노릇도 해보았고, 지금까지도 생각만 나면 눈물이 쑥 빠지는 연애도 어린 나이에 치러 보았고, 길바닥에서 만난 남자 만나 잠도 잤었고, 평생 동안 출입을 못할 것 같았던 교도소에 면회도 와 보았고,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중국 여행도 겁없이 혼자 해 보았고, 제 나이에는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경험한 게 많은 것 같은데 처음에 집 나설 적에 느꼈던 허전한 가슴은 여전하네요. 들으시면 정말 따귀 맞을 소린지는 몰라도 변씨는 그런 잡다한 것을 오래도록 곱씹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

"아직도 정한 거처 없이 떠돌고만 있군. 그 바람기를 모두 어찌 하려고 그러나? 어디 가서 점이라도 쳐 보지 그래?"

"해 보았죠. 여행운이 있답니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게 여행운이라데요. "

"역마살을 막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람인 게지. 나도 역마살이 붙어 다니지만, 이 교도소가 그 팔자를 고쳐 주고 있는 거잖아. 그러고 보면 나한텐 천만다행인 셈이지. "

"다시 돌아가긴 글렀고, 그리고 나도 단념한 지 오래됐고요. 중국서 만난 남자 얘기 공연히 했겠어요□ 내 입이 헤퍼서가 아니에요. 변씨 보고 싶어서 몸살도 났었지만, 실제로는 흔들리는 마음을 확실하게 가다듬으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 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

"아니야. 나 한선생 만난 지 오래 되었어. 언제 면회 올지 그것도 알 수 없고. "

"서울에 있어요. 그러나 친정은 아니에요. 서울에 있다는 것도 혼자만 알고 계세요. "

교도소를 나섰다. 길고 긴 담장 아래를 오래도록 걸어 나오면서 그제서야 승희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마지막이 될지 몰랐던 그 면회가 변씨에게 고통만 안겨 준 결과가 되어 버렸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갇혀 있는 사람의 고통은 아랑곳않았다.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였다 할지라도 올곧은 행위는 아니었다. 먼저 돌아서지 않고 그녀 먼저 면회실을 나설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기다려 주었던 변씨의 수척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짧은 소매 밖으로 드러났던 변씨의 깡마른 손목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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