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치 새바람] 중. 깨끗한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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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9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일본 총리의 정치자금 명세가 화제를 불렀다.

정치자금 수지보고서를 통해 '주간현대' 를 발행하는 고단샤(講談社)가 50만엔의 헌금을 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간현대' 는 "이렇게 무지.무능한 사람(오부치)한테 일본을 맡길 수 없다" 는 기사를 실었던 잡지.

오부치 총리는 "고단샤가 곧 '주간현대' 는 아니지 않으냐" "고단샤의 창업자는 동향인 군마(群馬)현 출신" 이란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지만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일본 선거관리위원회가 국회의원들의 '정치자금 수지보고서'를 공개하면 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구설에 오른다.

자금보고서가 3년 동안 공개되는 데다 언론.시민단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따져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원들은 구린 뭉칫돈을 받기 어렵다.

금액도 5만엔 이상은 모두 공개하기로 정치권 스스로 합의했다.

지난 8일에는 야시로 에이타(八代英太)우정상이 종교단체의 헌금 20만엔을 받은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종교단체 헌금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종교단체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정치도의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야시로는 결국 20만엔을 돌려주기로 했다.

일본의 정치자금은 투명한 유리상자에 들어 있다.

그 투명성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조짐이다.

'현재 열람만 가능한 정치자금 수지보고서가 앞으로는 복사도 할 수 있도록 법제화되는 데다 야당은 자금보고서를 아예 인터넷에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금권정치의 중심인 집권 자민당의 자정(自淨)노력도 눈에 띈다.

오부치 총리는 자민당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년 1월부터 기업.단체의 정치인 개인에 대한 헌금을 중지시키겠다고 밝혔다.

이는 자민당으로서는 제살깎기식 결단이기도 하다.

자민당 정치개혁본부에 따르면 정치자금 중 기업.단체헌금의 비중은 중의원의 경우 79.6%나 됐다.

참의원도 64.2%.의원들은 "선거를 앞두고 '총알' 없이 맨몸으로 싸우란 말이냐" 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는 개정정치자금규정법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강행처리할 방침이다.

'

일본의 정치자금에 대한 투명성 요구는 80년대말 대형 정경유착 스캔들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고개를 들었다.

특히 최근 2~3년 동안 대거 도산한 일본의 부실금융기관들이 정치권에는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정치자금을 상납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호된 비난을 받았다.

이런 여론의 압박으로 구린 뭉칫돈이 대거 모여들던 정치가들의 개별 수납창구(窓口)는 막히고 '정치자금을 당 공조직으로' 라는 슬로건이 빛을 보고 있다.

'자민당은 공조직에 접수되는 정치자금에 대해 세제혜택까지 검토 중이다.'

돈흐름의 방향이 바뀌면서 일본의 정치관행도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업.단체의 정치인 개인에 대한 헌금이 중지되면 파벌보다 당 공조직의 힘이 세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본 금권정치와 파벌정치의 핵심은 파벌 보스가 정치자금을 대거 끌어모아 계보의원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유지됐다.

이에 따라 돈흐름이 바뀔 경우 파벌보스의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자민당의 주요 파벌들은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바뀌면서 공천권에 대한 입김이 감소돼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깨끗한 정치는 재계의 요구이기도 하다. 경제 4단체의 하나인 경제동우회는 올 3월 정치개혁안 발표를 통해 기업.단체의 정치헌금을 규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검찰과 법원도 선거사범과 정치자금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정치권의 위기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스스로 금권정치의 온상인 이권(利權)구조를 깨는 방안을 마련 중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 최대의 정치자금줄이던 공공사업 분야가 맑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공공사업은 지명 경쟁입찰이 대부분이어서 유력정치인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최근 야당의 강력한 요구로 공공사업 대부분이 일반 경쟁입찰로 바뀌면서 금권정치.파벌정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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