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경제는 이류 정치는 사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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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영삼(金泳三)정부 시절 어느 기업총수가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로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당시는 '괘씸죄' 에 해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필자는 경제저널리스트다. 그럼에도 주제넘게 이따금씩 정치를 '논(論)' 해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국내 경제전문가들이 주눅이 들면서 감히 국내정치에 언급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경제적 국난이 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남의 동네' 일에 왈가왈부하느냐는 힐책과 핀잔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엉망이 되든 말든 경제만은…' 하며 정치를 애써 외면하고 사는 부류도 적지 않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어찌 하늘을 가리랴. 정치가 엉망이면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나라도 온전할 수 없다.

마침 동문인 서울대 정치학과의 장달중(張達重)교수가 자신을 비롯한 일본연구팀이 갓 번역한 책 한권을 보내왔다. 국제적 명성을 지닌 일본의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가 쓴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 다.

일본은 흔히 '경제는 1류, 정치는 3류' 로 일컬어져 왔지만 3류 정치 때문에 1류의 경제도 망가지고, 그 정치의 황폐화 때문에 일본은 몰락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정치가는 거의 사라지고, 이합집산을 통해 파벌을 만들고 정권을 잡아 선거구에 이익을 배분하는 '정치꾼' 들만 득실거린다.

교육개혁으로 제 아무리 뛰어난 관료와 회사원.문화인들을 키워내도 정치인의 질이 나쁘면 그 나라는 존경을 못받는다. 정치가 나쁘기 때문에 국민은 무기력하고, 국민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정치는 더 나빠진다.

정치의 빈곤은 곧 일본 경제가 경제외적 이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앞으로 50년간 확실히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는 일본의 몰락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상황과 이토록 흡사할까. 다만 경제가 일본처럼 '1류' 가 못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 경제가 2류임은 이미 IMF사태로 입증됐다. 2년간의 위기극복노력 또한 2류 수준이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긴다고 하면서도 정작 시장에 맡겨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자신에게 이로우면 관치(官治)에 업혔다가 불리해지면 시장원리를 외쳐대는 이중성은 가위 고질병이다.

부실투자한 기업인이 자신의 투자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부실을 키운 정책과 제도의 당사자들 또한 책임은 뒷전이다.

'세계 1등기술' 은 1%도 안되고, 수출품의 주요 부품들은 외제투성이고, '반도체 한국' 은 메모리칩 D램 위주의 불안한 외줄타기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치판은 나라야 어찌됐건 선거를 앞둔 정략과 여론몰이용 정치공세에 여념이 없다.

여당은 집권당으로서 '그릇' 과 금도가 없다. 그러잖아도 개혁은 고독한 과업이다. 온갖 기득세력이 저항하고 발목을 잡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개혁프로그램은 그 목표와 과정이 공명정대하고, 일관성과 일체성에 입각한 개혁청사진으로 장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대자와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노력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정치적 리더십도 크게 부족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새정치' 는 지금도 실종상태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행태도 가관이다. '뉴밀레니엄 정당' 은 고사하고 집권경험을 가진 야당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회창(李會昌)총재의 투쟁행태는 그가 청산을 주창하는 '3김식 정치' 행태와 뭐가 다른가. 툭하면 거리로 나서는 장외정치는 정치적 무능을 스스로 광고하는 행위다. 필자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고교까지 졸업한 부산토박이다.

부산이 지역정서를 부추기는 장외투쟁의 전략거점이 되는 데 대해 불쾌감이 앞선다. 런던의 하이드파크 같은 무슨 민의의 광장이면 몰라도 부산이 '4류정치' 의 상징적 현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가 비슷한 2류라면 어떻게든 1류로 끌어올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크게 처지면 경제를 더 아래로 끌어내리기 십상이다. IMF사태를 불러온 노동법 파동과 금융개혁법안 및 기아 처리의 지연 배후에는 한국의 정치가 큰 몫을 했다. 따라서 한국의 몰락을 막으려면 정치개혁과 정치적 혁신을 가장 먼저 이뤄내야 한다.

그럼에도 각종 개혁에서 정치개혁은 가장 뒤처져 있다. 스스로 개혁의지가 없고, 정치권은 국민들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그들과는 상관없는 '딴세상' 으로 방치되고 있다.

모리시마 교수는 '국민경제는 작은 엔진을 장착한 돛단배다. 자력으로 움직이면 속도가 늦다. 바람을 불어 속력을 빨리 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 이라고 했다. 무풍(無風)이면 차라리 괜찮다. 계속 역풍만을 뿜어댈 경우 결과는 우리 모두의 침몰뿐이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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