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문기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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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8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30여년간 프랑스 왕조가 자행했던 공개처형과 공개고문 제도는 왕의 절대권력을 널리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왕과 그 추종자들은 범죄자들에 대한 처형과 고문이 잔혹하면 할수록 왕권은 강화되고, 왕권에 대한 국민의 외경심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해서 공개처형과 공개고문의 현장은 의식(儀式)화하고 축제(祝祭)화하기 일쑤였다.

국왕 시해미수범인 다미앙에 대한 1757년 3월의 처참한 고문과 처형은 대표적인 예로 꼽힐 만하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셔츠만 걸친 다미앙은 1㎏ 무게의 양초 횃불을 들고 이륜마차에 실려 그레브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가 교수대에 세워지자 그의 가슴과 팔,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의 살점들은 발갛게 달궈진 집게에 집혀 떨어져 나갔다. 그의 사지(四肢)는 황산과 혼합액으로 다시 태워진 다음 세 필의 말에 묶여 갈갈이 찢어졌다. "

고문은 본래 고대사회부터 피고인 혹은 피의자의 신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백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이용돼 왔지만 18세기 프랑스의 경우는 그 목적이 크게 변질됐음을 보여준다.

증거와 정황으로 범행사실이 분명하고 범인 자신이 순순히 자백했더라도 그와는 관계없이 고문은 자행된 것이다.

군주국가 체제에서의 고문이 왕권의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통제의 구실을 했다면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고문도 권력 유지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비록 공개적으로 자행되지는 않는다지만 독재국가나 경직된 사회에서 자행되는 고문 역시 권력 유지의 수단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이다.

고문방식 또한 하나의 '기술' 로 인정될 만큼 교묘하고 악랄해져서 공개고문 이상으로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는다.

그래서 통치자가 권력 유지에 급급해 하는 나라일수록 '고문기술자' 를 필요로 하게 되고, 고문기술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우대받게 된다.

30년이 넘는 군부정권을 체험한 우리나라는 한때 '고문의 왕국' 으로 까지 불린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70년대의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를 비롯해 '대공(對共)' '공안(公安)' 을 앞세운 각종 기관들이 악명을 떨쳤다.

오죽하면 '성(性)고문' 까지 등장했을까. 그 '붐' 을 타고 승승장구했던 고문의 최고 기술자가 11년이나 도피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검찰에 자수했다는 소식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 고문을 밥먹듯 하는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으로 이젠 확신하고 싶다. 그가 우리 사회의 '마지막 고문기술자' 로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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