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죽음의 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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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차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종전(終戰)후 핵무기가 몰고올 재앙을 우려하는 모임인 시카고원자과학자협회(ASC)를 결성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발기인으로 ASC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1945년 12월부터 격월간 회보(會報)를 발간했다. 편집 디자이너 마틸 랭스도프는 그후 핵재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지 디자인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둠즈데이 클락(지구종말의 날 시계)' 을 생각해냈다.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종말을 자정(子正)으로 잡고 현재의 상황을 시각으로 표시한 도안을 회보 표지에 게재한 것이다.

둠즈데이 클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47년 6월호로 자정 7분 전에서 시작했다. 그후로 시각을 고친 것은 지금까지 16회. 자정에 가장 근접한 때는 미국과 소련이 수폭(水爆)실험을 한 1953년으로 2분 전까지 갔다.

가장 멀었던 때는 미.소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하고 전술.전략핵무기 추가 감축을 선언한 1991년으로 17분 전이었다.

지난해 인도.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함으로써 상황이 악화돼 현재는 9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지난 25일 또 하나의 둠즈데이 클락이 등장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회관 입구에 설치한 '죽음의 시계' 가 그것이다.

이 시계는 8초에 한 명 꼴로 사망하는 흡연관련 사망자를 숫자로 표시한다. WHO는 세계 흡연인구가 11억명이며, 이 가운데 매년 4백만명이 흡연관련 질병으로 사망한다고 집계하고 있다.

이같은 추세라면 오는 2030년 1천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3천여종의 유해 화학물질과 20여종의 발암물질이 들어 있다. 흡연자의 폐암 발생률은 비(非)흡연자보다 21배나 높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지난 94년 담배를 '중독성 마약' 으로 규정하고, 백악관을 금연구역으로 선포했다. 미국정부는 담배회사에 천문학적 숫자의 배상금을 물리고 있다. 개인 차원의 손해배상소송도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인 골초국가다. 지난 97년 WHO에 보고된 15세 이상 남성 흡연율은 68.2%로 세계 1위다. 매년 흡연관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3만명 이상, 경제적 손실이 6조원에 달한다.

최근 들어 여성과 청소년 흡연이 급속히 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과거 남성 매력의 상징이던 담배가 이제 인류의 공적(公敵)이 됐다.

아무리 애연가라도 죽음의 시계에 시시각각 표시되는 숫자에 자신이 포함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담배 맛이 좋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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