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정희 방식'을 넘어설 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거 20주년을 계기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찬반논의가 활발하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朴대통령이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오늘의 한국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엄청난 희생도 치렀다. 철저한 1인독재와 인권탄압은 불균형적 개발전략에 따른 소외분야의 불만을 억압하고 경제발전 일변도의 국정운영을 위해 유용한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유산을 남겼다.

시대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朴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을 답습하는 것도 그 하나다. 세계화.민주화.정보화가 가속되는 새 천년의 지식혁명시대에 적합한 국정운영방식을 찾는 것이 朴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토대로 더 큰 국가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 길이다.

능력있는 기업가나 민간 투자재원의 부족 때문에 강력한 정부 주도의 개발전략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적으로 얽히고 설킨 경제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대대적인 정보화와 맞물려, 민간의 각 분야에 의해 주도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환경문제.복지문제 등등도 모두 민간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지적 자본의 축적 등 민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민간과 정부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새로운 국정관리의 요체가 되고 있다.

국가의 경쟁력은 국민 모두가 지식시대를 대비하는 역량 축적에 따라 좌우된다. 더욱이 경제제일주의가 지배하던 朴대통령시대와는 달리 대립되는 통치이념과 가치들이 국정운영의 곳곳에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들을 국정운영의 기본적인 틀 속에서 통합하고 조정하는 역할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기능이므로 당연히 정치권에서 담당해야 효율적이다.

정치권의 후진성이 극복돼야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담당할 수 있다. 전문성 있는 국회를 만들고 비전 있는 정치적 역군들을 양성해 이들이 정치적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권위주의적 정당운영도 과감하게 개혁돼야 하고, 정치문화도 개혁돼야 한다.

전문성을 지니고 민의를 정확히 파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양성되지 않으면, 인터넷을 통해 가상집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전자정부시대에는 대의제민주주의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지식정부의 시대에는 행정부의 운영에서도 朴대통령의 관리방식을 크게 수정해야 한다. 실적주의 행정관료제를 구축하고 인재를 발탁한 것은 朴대통령의 커다란 업적으로 칭송받아야 하지만, 지나치게 결정권을 독점해 행정부 전체의 전문성 축적과 현실성 있는 정책을 경시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이미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대통령 자신과 비서실에서 세세한 결정까지 담당했기 때문에 일선현장에서 발생하는 집행상 문제들이 제대로 보고되지 못하는 심각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부처들이 권한과 책임을 지고, 모든 관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분야별 전문가와 양식 있는 국민들의 지혜를 총동원하기 위해서도 분권화는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해 대통령과 정부의 주도집단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 제도와 관행을 개혁해 민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며, 과학적인 행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관행을 정착시키는 것이 국정주도집단의 역할이며 책임이다.

세계의 움직임을 주시해 국가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 개혁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개혁의 큰 틀 속에서 세부적인 전략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문제의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부기관과 전문가들의 몫이다.

선의로써 추진하는 정책이나 개혁도 저항과 무관심에 부닥쳐 정부지도자들을 분노하게 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민주정부의 특징이다.

그러나 5년 단임제하에서의 대통령과 주도집단은 부족한 시간과 한정된 능력을 감안해 지나친 의욕을 자제해야 한다.

정부가 올바른 국정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절실한 제도적 문제에 주의를 총집중해야 국가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정정길 <서울대교수.행정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