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18)

김승욱이 찬거리를 갖고 다녀간 두 시간 후에 태호는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잠이 깊이 들었었지만, 섬뜩한 인기척을 깨닫고 문득 어섯 눈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가위에 눌린 듯 냉큼 일어날 수 없었다. 소파에 엎드려 있던 그의 시선에 우선 바라보였던 것은 세 사람의 낯선 하반신이었다.

그들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침없이 저벅저벅 거실로 들어와 전등을 켜고 다짜고짜 태호의 뒷덜미를 누르며 흔들어 댔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태호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사뭇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몸을 뒤척이며 때늦은 응석을 떨었다.

금방 강도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소파에 엎드린 그의 목덜미에 싸늘한 쇠붙이가 와 닿았다.

한 번의 경험으로도 총기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로선 알 수 없는 한마디가 들렸다.

"치라이(起來:일어나라). "

잠은 이미 백리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가까스로 눈을 뜬 시늉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대담한 사내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세 사람 모두 복면을 하지 않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문득 발걸음을 되돌려 현관의 도어를 안에서 잠갔다.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구이샤(足危下:꿇어앉으라). "

중국어를 터득해서가 아니라, 잠행로 근처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의 경험에 미루어 이 순간에 자신이 보여 주어야 할 첫 번째의 굴복 중에 꿇어앉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내가 태호의 등 뒤로 돌아가 두 팔을 위로 끌어당겼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응대하고 있었지만, 사태가 심각하기보다는 미묘하다는 생각이 앞서기 시작했다.

자물쇠를 소리없이 따고 침입한 강도들이 복면을 하지 않았다는 대담성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간편복 차림이긴 하였으나, 입성들도 한결같이 말쑥하다는 것도 이상했다.

이를테면 그들의 행태가 강도답지 않다는 것에 불안감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면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질지 손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예측할 수 없다는 태호의 어렴풋했던 짐작은 비로소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잠자던 사람을 들깨워 바닥에 꿇어앉혔다면, 민첩하게 뒷결박을 짓고 아갈잡이를 하고 난 다음, 현금이나 흉기 따위를 찾아내기 위해 몸부터 검색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않고 자질구레한 세간살이와 집구석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세간살이에 그들이 겨냥하고 있는 현금이 허술하게 숨겨져 있을 리 만무했다.

태호는 루블화와 런민비(人民幣), 그리고 달러화를 합쳐 한화로 환산하면 천만원 상당의 현금을 지니고 있었다.

그 현금은 물론 바로 그들이 뒤지고 있는 이 아파트 거실 안에 은닉되어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거실의 전등을 켜 주는 스위치가 바른 쪽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스위치를 뽑아내면, 직사각형의 작은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 왼쪽 벽면 사이의 시멘트벽을 긁어내 홈을 만들고 담배개비처럼 꽁꽁 뭉친 현금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 비밀금고의 아이디어는 태호가 서울에서 앵벌이로 생활할 때 터득했던 위장 은닉술의 한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앵벌이 생활은 회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옛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객지에 떨어져 난감한 지경이 되었을 때, 앵벌이의 추억은 곧잘 그런 기지를 마련해주곤 하였다.

그들이 사람의 손이 수시로 닿는 전등 스위치 안에 교묘하게 숨겨진 현금을 찾아낼 재간은 없을 것이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느라고 시간이 꽤나 흘러갔다.

그러나 시간 따위에는 구애를 받을 게 없다는 듯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들이 찾아낸 현금이라곤 태호의 몸에 지녔던 런민비 50위안 정도였다.

낙심천만이 된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숙의한 뒤 태호에게 보여준 것은 한글로 갈겨 쓴 증서 같은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