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창작집 '딴나라 여인'낸 윤정모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기지촌여성의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고삐' 를 비롯, 80년대 내내 종군위안부 문제.농민문제. 광주항쟁. 반미 (反美) 등 우리 현대사의 시린 면면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던 소설가 윤정모 (53) 씨가 8년만에 새 창작집 '딴 나라 여인' (열림원.7천원) 을 펴냈다.

이념과 열정이 동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90년대를 영 못견뎌 했던 작가가 딸의 유학길을 따라가는 척, '딴 나라' 영국으로 떠났던 것이 2년 전. 행여 '딴 나라 사람' 이라도 되버린 건 아닐까. 작가는 헛된 의심을 나무라기라도 하듯, 더 넓은 세상에서 생의 치열한 불씨를 찾아내려는 행보가 엿보이는 8편의 단편을 내놓았다.

어렵게 뒷바라지한 남동생 가족과 여주인공의 괴리를 그린 표제작을 비롯, 작가는 격한 상처들로 '꼬일대로 꼬인' 인생들을 등장시켜 그들 상처 마디마디에 내재한 치열함으로 독자를 흡입한다.

이는 80년대부터 일관된 작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신문사 고위간부인 남편의 늦바람에 속을 썩이는 주부 ( '열꽃' ) 나 애욕을 억누르지 못해 숱한 '아비없는 자식' 을 낳은 노인 ( '덫에 걸린 인생들' ) 처럼 정반대되는 인물들의 내면을 넘나드는 작가의 변화가 드러난다.

혼자 집을 보다 성폭행 당한 경험 때문에 더욱 더 직업 가진 어머니를 증오하는 딸 ( '볼록거울' ) , IMF직후 절망의 벼랑에 선 유학생 ( '누가 열매를 따는가' ) , 미국의 양어머니도 한국의 친어머니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입양아 ( '탱고' ) 등 이번 창작집에서 작가에게 속내를 포착당한 인물들의 면면은 그 어느때보다도 다양하다.

그러나 터뜨려지지 않고 일상에 함축된 상처야말로 쉽사리 다독여지지 않는 법. 그래서 작가는 희망과 낙관의 실마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대신, 상처를 강렬하게 응축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갑갑증을 풀러 뉴욕의 딸을 찾아간 주인공이 딸의 뜻밖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는 '열꽃' 은 그같은 경향이 집약된 작품. "당신은 살겠구나. 남자는 늙어도 빈 껍질이 되지 않는다더라. 그러나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나는, 폐경기도 다 지난 나는…" 하는 주인공의 낮은 음성은 화해가 쉽지 않은 인생사의 상처에 대해 호소력있는 성찰을 더한다.

정작 작가는 스스로의 열꽃을 개운히 앓아냈을까. 창작집 출간에 때맞춰 잠시 귀국한 작가는 오랜 비행기여행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빛나는 눈빛을 잃지않고 있었다.

작가가 털어놓은 눈빛의 비밀인즉, 아일랜드의 역사를 소재로 장편작업을 시작한 것. 현지 유학생들과 아일랜드 작가들의 도움으로 자료조사와 취재를 진행중인 새 장편은 한세기 가까이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펼쳐온 아일랜드 사람들의 뜨거운 기질과 초기 우리네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인연을 나란히 엮어간단 구상이다.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자료조사를 겸할 계획이라는 그와의 대화에는 독립을 위한 싸움이 한창인 동티모르와 코소보, 굶주린 수단과 북한이 차례로 화제에 올랐다.

열정을 잃어버린 헛헛한 시대를 탓하는 대신, 더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을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은 그가 곧잘 어울린다는 30대 유학생들 못지않게 청년다웠다.

"외로울 시간이 없었다" 고 말하는 작가에게 한국땅에 혼자 남겨둔 남편걱정이 되지 않더냐고 묻자 "할 수 만 있다면, 연애하라고 권한다" 면서 웃었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