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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넘어선 헌신 …‘문명 전도사’ 언더우드 타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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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894년 한반도 서북지역에 선교차 여행 중이던 언더우드 가족. 앉아 있는 남녀가 언더우드와 부인 호톤이며, 서 있는 아이는 외아들 원한경이다.

1916년 10월 12일 신촌 원씨의 시조 원두우(元杜尤, Horace G. Underwood)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을 지도하는 분들도 조선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글을 쓰고 있었다. 왜 너 자신이 스스로 가지 않느냐는 메시지가 제 가슴을 울린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 그는 오랜 꿈을 접고 미지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에 응답했다. “모든 교회는 선교사가 일하고 있는 선교현장에 현지 교회의 자급(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 자치(self-governing)를 추구하고자 한다.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우리 선교부는 결국 이 방식에 따라 교회를 더욱 확고하게 세워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 땅의 사람들 스스로 ‘그들의 교회’를 세우기를 마음 깊숙이 바란 그는 그 토대인 근대 문명도 자기 힘으로 창출하길 염원했다. 제중원과 세브란스의전을 통한 의료사업,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 고아원 같은 사회사업, 청년운동과 계몽활동, 『한영자전』과 『한국어 문법』 간행과 같은 한글 근대화 작업, 그리고 해외에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한국학 개척….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26세의 청년은 ‘타오르는 횃불’로 30년 동안 이 땅에 복음만이 아닌 문명의 빛을 비추었다.

“거의 십 년간 이 나라의 선교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이에게 매혹적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나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읽었고, 참으로 그것은 사도행전의 한 장과도 같았다. 개신교 선교사가 이 나라의 기독교 수용에 대한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없이 조선으로 파송된 지 아직 4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선교는 당연히 속도를 늦추어야 하며, 직접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수년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갈림길에 선 조선’, 『한국선교현장』, 1908). 어찌 보면 그가 펼친 근대문명의 씨앗 뿌리기 작업은 기독교 포교를 위한 터 닦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시절에 시작된 그의 교육·의료·계몽 활동은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대다수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의 역량에 의문을 표시하던 그때. 우리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씨뿌리기에 온 몸을 바친 그의 혜안이 밝게 빛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