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베를린의 '북.미 흥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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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렵사리 성사된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리고 있는 곳은 옛 동베를린 지역이다.

회담장인 미국 대사관 별관과 북한 이익대표부가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다.

'운터 덴 린덴' 가 (街) 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그랑카가를 끼고 여섯 블록밖에 안 떨어진 두 나라 공관의 정치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거래가 지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느 때의 북.미 회담과 마찬가지로 이번 회담에서도 도무지 어느 쪽이 아쉬운 쪽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회담 전 만난 미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취재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다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찰스 카트먼 한반도평화회담 특사도 기자들의 코멘트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는 수시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

여유있는 표정으로 취재기자들과 질의.응답도 나눈다.

미측 대표단의 일원인 국무부 한국과장이 곁에서 긴장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때마침 도읍을 베를린으로 이전한 통일독일이 7일 연방의회 (분데스타크) 개원식을 가졌다.

히틀러의 제3제국 의회로 신축된 건물이 동독 치하에서 연방의회란 이름으로 재단장되더니 이제 50년 만에 통일된 국가의 첫 의회로 변모한 것이다.

옛 동베를린은 이제 번화가마다 에스카다.도나카렌.에트로 등 서구의 고급 패션점이 들어서고, 휴대폰 울리는 소리가 이방인의 귀를 어지럽힐 정도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모스크바.베이징과 더불어 북한의 주요 공관지였던 동베를린을 회담지로 택한 북한측의 속내를 깊이 헤아릴 길은 없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는 한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회담장 분위기가 어떻든, 밀고 당기는 과정이 어떻든 대미협상의 종착역은 결국 '북한측의 변화'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북한의 대표단은 급속히 변화하는 옛 동독 수도의 번화가를 오가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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