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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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2) 이박사와의 만남

그날은 몹시 추웠다.

신탁통치 결정소식이 전해진 뒤 이틀이 지났고 내가 연희교정에 '반탁 (反託) 모임' 격문을 붙인 지 하루가 지난 1945년 12월 30일 아침. 갑자기 몰아친 한파 (寒波) 때문에 과연 몇명의 학생들이 모임에 참석할 지 내심 걱정이 됐다.

모임장소인 강당에 갔더니 수백명의 학생이 자리를 빼곡이 메웠고 그 열기는 추위마저 녹일 태세였다.

나는 서구열강이 자치능력이 없는 미개민족을 대리통치하는 것이 신탁통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연합국의 신탁통치는 우리의 민족정기와 자존심을 정면으로 깔아 뭉개는 처사' 라며 총궐기를 호소했다.

그 자리에서 반탁학생회가 출범했으며 나는 회장이 됐다.

거의 동시에 경성대학 (현 서울대학교) , 보성전문 (현 고려대학교) 을 비롯한 서울시내 각급 대학에서도 반탁학생회가 구성됐다.

46년 1월초, 이승만 (李承晩) 박사 비서로 일하던 윤치영 (尹致暎) 선생이 갑자기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李박사를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尹선생은 아버지와 같이 안국동 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던 터라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고 있던 분이었다.

나는 혼자서 李박사 거처인 돈암장 (敦岩莊) 으로 갔다.

정원에 놓여있던 큰 바위들이 인상적이었다.

"반갑습네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의 李박사가 나오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뒤따라 나오자 李박사는 잠시 영어로 부인에게 뭐라고 얘기했는데 아마도 나를 부인에게 소개하는 듯했다.

李박사는 "애국.애족하는 젊은이가 많을수록 나라가 바로서게 된다" 며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순수한 학생운동이 정치와 연계돼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린 뒤 정신적으로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프란체스카여사가 직접 차를 가져왔다.

흰 잔에 검은색 차, 내가 처음으로 본 커피였다.

향은 기가 막혔는데 마셔보니 진하게 달인 한약 같았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절간의 사천왕상 (四天王像) 처럼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는 잠시 당혹스러워 하더니 곧 그 까닭을 알만 했던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李박사를 여러차례 만났다.

그는 철저히 미국적 사고에 젖어있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주의적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어보려 했지만 결국 그는 그 열매를 떨어뜨리는 장본인이 돼버렸다.

'만일 재선 (再選) 대통령만 하고 물러나 국가원로로 나라를 인도했더라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부 (國父) 로 남을 수 있었을 것' 이라는 게 내가 지금껏 이박사를 두고 느끼는 안타까움이다.

1965년 3월 중순, 나는 외무장관으로 미국을 방문해 한국군의 베트남파병 (派兵) 문제를 논의중이었다.

러스크 국무장관.존슨 대통령을 잇따라 면담하는 워싱턴일정을 끝낸 뒤 李박사를 만나러 하와이에 들렀다.

마우날라니 요양원에 있던 李박사는 90회 생일 (3월 26일) 을 앞두고 있었지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한 모습이었다.

방안에 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프란체스카여사가 간호하느라 침대로 대신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이 장관, 박사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같습니다. " 프란체스카여사는 남편의 기구한 운명에 설움이 복받쳤는지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박사님은 얼마 전까지 내가 시장에 갈 때면 돈을 많이 쓰지 말라고 당부하곤 하셨어요. 조국에 돌아가려면 여비가 필요한데 너무 많이 쓰면 어떡하냐는 말씀이었지요. "

나를 쳐다보며 격려하던 그 위대한 풍모는 어디가고 이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외롭게 누워 있을까. 그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프란체스카여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돌아가거든 李박사 귀국문제를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꼭 좀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李박사는 그로부터 석달 뒤인 7월 19일 새벽 영면 (永眠) 했다.

李박사와의 첫 만남,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도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오롯이 녹아 있었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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