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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1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11장 조우

그런데 한씨 행중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때마다 고분고분 전화를 받아 주던 방극섭이란 사람과 동행으로 서울 나들이를 나가고 없다는 것이었다. 한씨 일행은 한국의 중부지방과 남부 해안지방을 강타했었던 집중폭우와 태풍피해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채소류 값에 편승해 눈코 뜰새 없었다.

고흥 특산품인 채소와 마늘을 차떼기로 서울의 가락시장 경매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오대 (大手) 들이 거느리고 있는 중개인들이 모여들고 삽시간에 경매에 부쳐진다는 것이었다. 마늘이나 고추 같은 상품 경매시장은 통상 밤 10시 이후라는 것은 박봉환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고흥이 멀다 해도 여섯 시간이면 서울에 당도하기 때문에 밤낮을 모르고 드나들고 있었다.

조급해진 태호는 결국 비밀에 부치려 하였던 안면도의 희숙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흥과 가락시장을 밤을 낮 삼아 뛰고 있는 길바닥 인생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희숙뿐이었다.

그리고 동대문과 남대문의 단골점포들과 안면이 있고 겨냥하고 있는 상품의 구입가격을 제대로 꿰고 있는 사람도 한철규와 희숙뿐이었다.

한철규가 희숙을 동행하여 웨이하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건이 터진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전화로 소상하게 일러준 품목과 수량들을 여축없이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거래는 해관 밖 길바닥에서 재빠르게 이루어졌다. 눈썹성형기와 디자인이 다양한 머리핀, 틀니를 하고도 갈비를 뜯을 수 있는 틀니접착제, 소형 마사지기, 욕탕 안에서 피부 마사지를 할 수 있는 전자 클린징, 튀어나온 아랫배를 감춰 주는 순간 슬림벨트, 티눈 보호패드, 양말 속의 발가락 양말,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성 매니큐어, 대나무 숯 실크팩같이 다양한 상품들이었다.

거래를 끝내고 해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서기까지 한철규는 사건의 내막에 대해선 세세하게 묻지 않았다. 우선 김승욱으로 하여금 희숙을 멀찌감치 따돌리게 한 뒤 소상한 사건내막을 알려 주었다.

"선배,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선배 곁을 떠나올 적엔 두번 다시 선배에게 걸기적거리는 일은 없게 하려고 다짐했는데…. 반년도 못 되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습니다. "

"승희랑 형식이 안부 전하더라. 형식은 편지라도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시간이 없었어. " "옌지까지 가시렵니까? 돌아가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봉환을 안 보고 돌아설 수 있겠어?" "누님 보고 싶네요. 변선생님도 잘 있습니까?" "그 형님이야 예나 지금이나 밥 잘 먹고 잘 쉬고 있지. "

"지금도 주문진에 있습니까?" "여행 다니고 있어. 그런데 여기서 옌지까지는 기차를 타도 이틀이나 걸린다지?" 자리를 비켜났던 희숙이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채근을 따돌리기 힘겨웠던 김승욱이 곧이곧대로 일러바친 듯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럿 앞에서 앙탈은 부리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태호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일행 중에 태호 혼자서만 신색이 멀쩡하다는 것에 비윗장이 뒤틀렸거나 긴가민가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칭다오로 가서 기차를 타기까지 희숙의 침묵은 사뭇 계속되었다. 김승욱이 끼니 때마다 애성바르게 굴었으나 곡기까지 끊어 버렸다. 그럴수록 태호는 바늘방석이었다. 잠깐 소홀하면 어느새 난간으로 혼자서 울고 있었다.

해망쩍은 여자 속내에 자해하는 일이라도 저지를까 해서 김승욱을 곁에 붙여 두어야 했다. 그러나 옌지에 당도해서 회복이 빠른 박봉환을 확인하고 나서는 헤죽헤죽 웃고 다녔다.

그러나 이젠 손씨가 문제였다. 자다가도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고 괴성을 내지르는 버릇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희숙은 태호와 짝이 되어 탈취당한 돈을 찾을 수 있는 방도를 찾자고 김승욱을 들볶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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