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공신력의 마지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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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공권력의 공신력 문제는 우리 사회의 만성질환이 됐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최근 국회 청문회에서 다룬 사건들, 특히 옷로비 사건은 이런 불신풍조를 더욱 굳혀주었다.

'환골탈태' 를 목청 높여 외치고도 이 모양이니 정말 '대책없는 검찰' 이란 체념에 빠지게 된다.

국가권력은 본질적으로 남용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개인의 힘을 뛰어넘는 차원의 사회질서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 국가조직의 목적인 만큼, 그 운용자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운용자측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힘이 국가에 있다.

과도한 남용으로 공권력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의 묘를 살리는 것이 그래서 선진정치의 요체다.

어느 정치선진국에도 공권력 남용 문제는 있다.

미국에서도 중앙정보국 (CIA) 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구설수는 그치는 날이 없고 경찰은 인종차별적 업무자세로 끊임없이 비난받는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는 공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다.

CIA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미국 시민에게 위해는 끼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1976년 워싱턴에서 일으킨 차량폭탄테러는 카터 대통령의 당선을 돕고 미국의 지원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찰의 잘못은 경관 개개인의 잘못으로 이해되지, 구조적 문제로 의심받는 일은 좀체 없다.

모처럼 미국의 공권력이 국민들의 근본적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하나 터졌다.

1993년 텍사스주의 한 종교집단이 본부를 수색하려는 연방수사국 (FBI) 등 정부요원들에 맞서 50여일간 농성한 일이 있다.

농성은 화재로 끝났고 80구의 시체가 현장에서 발견됐다.

정부측은 화재가 농성자들의 자해행위로 추정되며 진압에 어떤 인화물질도 쓰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6년여가 지난 이제 발화성을 가진 두 발의 최루탄이 그 날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관계자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

재닛 리노 법무장관은 그 최루탄들이 화재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하면서도 잘못된 발표의 이유를 철저히 추궁하겠다고 다짐한다.

은폐의혹이 불거져나온 뒤 리노 장관 등 관계자들의 솔직한 대응자세가 부럽다.

최루탄이 화재의 원인이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최루탄이 사용된 일이 없다고 한 발표의 잘못 자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원천적으로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궤도이탈에 의한 공권력의 전복만은 막을 수 있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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