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전문기자 리포트] 재벌개혁론 허와 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찻잔 속의 태풍, 재벌개혁. 8.15 경축사 이후 한동안 재벌개혁 문제로 시끄러웠다.

요즈음은 조용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엉뚱한 논의를 하느라 잠시 딴 곳에 정신이 팔려서다.

또 잘못 얘기했다가는 "대통령의 철학을 잘못 '학습' 한" 재벌비호세력 또는 시장경제를 앞세운 보수기득권 내지 반개혁세력으로 몰릴까 두려워 조용한 것이다.

그 엉뚱한 논의부터 따져보자. 경축사에 이은 정책자문위원들의 발언을 두고 우리는 정부가 노리는 것이 재벌해체냐, 또는 이 정권이 과연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정권이냐를 두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그 중요한 논의를 시간낭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벌개혁이 지향하는 바 그 내용이나 또는 그것을 얘기하는 어조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재벌해체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후 추진해온 재벌개혁 과제와 최근 새로이 추가된 것을 분석컨대 두 가지 큰 방향이 잡힌다.

하나는 독립경영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인경영이다.

그러나 재벌이 무엇인가.

여러 개의 계열사들이 마치 한 회사처럼 소유와 경영이 얽혀 있는 것, 또 그것을 총수가 끌고 나가는 것이 바로 재벌 아닌가.

그렇다면 계열사간의 소유.경영관계를 끊어 독립경영하고, 총수 가족에 의한 족벌경영 체제를 무너뜨리라는 정부의 주문은 재벌해체밖에 의미를 달리 붙일 것이 없다.

그래서 재벌해체냐 아니냐의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아니 그 논의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재벌개혁이 과연 재벌회사나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느냐다.

재벌을 개혁하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스스로 변신해 건전한 국제경쟁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마다할 재벌은 없다.

지난해 2월 재벌총수들이 합의한 것이 바로 그런 변신을 겨냥한 것들이다.

경영을 투명케 하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해 총수의 독단경영을 견제케 하며, 재무구조를 개선해 스스로와 나라 경제에 부담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했다.

정부가 강요한 점이 없지 않았으나, 논리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재벌들이 제깐에는 열심히 구조조정과 개혁을 추진했고, 정부도 재벌의 노력을 상당부분 인정해 왔다.

문제는 최근의 개혁과제다.

독립경영.전문인경영 다 나름대로는 논리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독립경영을 해야 한 계열사의 부실이 다른 계열사로 이어지지 않고, 그래야 그룹 전체의 부실로 번지지 않는다.

또 전문경영인이 나서야 총수의 독단경영을 막아 최근 삼성차나 대우그룹의 경우와 같은 엄청난 경영 실책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경영이 선단 (船團) 식 경영보다 낫다거나, 전문인경영이 총수경영보다 낫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입증되지 않은 '논리' 일 뿐이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지난 두해 불황 통에 선단식경영.총수경영을 하다가 망한 기업이 많은 만큼 독립경영.전문인경영을 하다가 문을 닫은 곳도 많았던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은 시장에 따라서는 선단식 경영을 해야 IMF위기와 같은 불황 때 기업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고, 경영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총수라는 강력한 '주인' 이 있었기에 과감한 투자와 기업의 성장, 나아가 지난 40년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이 가능했다고도 한다.

경영을 해보거나 경영을 많이 연구한 사람일수록 그렇게 얘기한다.

개혁은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를 느낄 때 제대로 추진된다.

가장 적합한 소유와 경영체제는 총수를 포함한 회사 내부의 경영자원과 시장사정을 고려해 회사가 결정해야 한다.

총수나 이사회가 나서서, 혹시 이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주주총회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소유.경영체제를 바꾸었다가 기업이 부실해지면 정부가 책임질 것인가.

김정수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