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벤처기업 M사의 金모 (36.경기도 수원시) 사장은 지난15일 국내 대기업과 15억원에 달하는 장비납품 계약을 맺었다.
그렇지만 요즘 金사장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왜 그럴까. 불합리한 대기업의 물품대금 지불 관행과 보증제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렇다.
金사장은 당장 연간 재산세 납부 실적이 5만원 이상인 45명을 보증인으로 세워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렇지 않으면 M사에 납품할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구입비 등으로 9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해당 기업으로부터 이에 필요한 선급금 (先給金) 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金사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납품대금 결제관행에 따라 15억원을 세차례로 나눠 30% (4억5천만원).40% (6억원).30% (4억5천만원) 씩 60~1백20일짜리 어음으로 받게 된다.
문제는 선급금 30% (4억5천만원) 를 받기 위해 반드시 서울보증보험회사에서 발행하는 보증증권을 발급받아 M사에 건네야 한다는 것. 金사장은 최근 이를 위해 이 보험회사를 찾았다가 말문이 막혔다.
보증증권을 발급받고 싶으면 선급금 1천만원당 1명씩, 45명의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요즘같이 부모.형제도 보증을 서달라면 손을 가로 젓는 마당에 어떻게 45명이나 보증인으로 세울 수 있겠느냐고 통사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金사장은 기가 찼다.
"아예 보증증권을 발급받지 말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선급금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습니다. " 이와 관련, 서울보증보험회사 관계자는 "IMF 이후 회사 경영이 악화된 데다 중소기업 부도율도 부쩍 높아 보증요건을 까다롭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고 해명했다.
결국 金사장은 선급금 받기를 포기했다.
그럭저럭 회사에 남은 돈으로 꾸려가고, 부품업체들에도 사정을 설명해 대금결제를 한 달 미루겠다고 협조를 구했다.
이에 앞서 金사장은 지난5월에도 모 대기업과 1억7천만원어치의 장비를 납품키로 계약했으나 선급금을 받지 못했다.
보증인 5명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재산세를 30만원을 내고 있으니 혼자 보증을 서도 재산세 5만원을 내는 보증인 6명 몫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가 핀잔만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른다" 면서. 金사장에겐 선급금을 따내는 게 '그림의 떡' 인 셈이다.
金사장은 근본적으로 대기업의 대금 지불관행이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업 특성상 튼실한 상장사들과 거래해왔는데도 현금은 거의 구경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 5월 중소기업협동중앙회에서 현금거래비중이 40% 가까이로 늘었다고 발표했을 때 金사장은 코웃음쳤다.
그는 "결제금액이 1백만원 이하일 때를 제외하곤 현금을 구경한 적도 없다" 고 말했다.
통상 현금 대신 어음으로 받게되다 보니 까다로운 보증문제까지 생긴다는 것.
金사장의 하소연. "이제는 덩치 큰 주문은 받고 싶어도 자금이 달려 엄두가 나질 않아요. 일단 장비제조를 하려면 계약액의 60% 정도 목돈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마련합니까. 설사 우리 돈을 갖고 만들어서 납품해도 몇달짜리 어음을 받으니…."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기획과 이동규 과장은 "IMF 이후 어음제도에 대한 문제점이 많이 드러나 물품대금을 현금화할 수 있는 다양한 개선책을 검토하고 있다" 고 밝혔다.
기획취재팀 = 박장희.고정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