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단속만으로 돈 해외유출 못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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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가 국내 자산의 불법 해외유출을 단속하겠다고 한다. 최근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자산이 가파르게 늘어나는 추세가 도저히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올 1~5월 해외여행.유학.이민으로 빠져나간 개인자산은 80억7000만달러에 달했다. 공식 집계된 개인 송금만도 물경 10조원에 이른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무역 거래를 위장하거나 환치기 등으로 빠져나가는 자금이 더욱 빠르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올 상반기 중 적발된 불법 외환거래는 1조3000억원으로 지난해의 5배에 달했고, 이중 재산도피용으로 주로 이용되는 환치기는 열배나 늘었다. 적발된 게 이 정도니 실제 빠져나간 돈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뭉칫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니 국내 소비와 경기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 돈은 또 미국.중국 등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투기 등 갖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인 타운에는'외화송금 알선' 광고문이 봇물을 이룬다니 정부가 범정부 차원에서 불법 유출에 대응키로 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다.

그러나 단속만으로는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재산의 해외 유출이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정권과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 한국의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때문이다. 심각한 내수침체로 경기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도 이전, 과거사 등 정치적 공방으로 국민을 끝없는 절망감으로 몰고 있다. 대통령부터 앞장서는 부자에 대한 적대의식, 여권의 반기업 정서, 낙후된 교육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돈을 해외로 쫓아내고 있다. 좌절과 절망의 분위기는 이제 특수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최근에는 국민 전체로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단속과 규제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이 현상을 방치하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불법 재산 도피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과 기업인들이 국내에서 투자하고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