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축제 사라진 광복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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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광복절은 언제부터인가 축제성 (祝祭性) 을 잃어 버렸다.

다른 나라의 독립기념일처럼 우선은 즐겁고 기쁜 날이 아니다.

정치 면죄부 발행 같은 사면 (赦免)에도, 지난날의 한 (恨) 과 요즘의 따라가기 힘든 랩뮤직이 뒤범벅 된 이벤트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올해 8.15 경축사에도 지금까지의 뿌듯함이나 앞으로의 벅참은 없다.

제목만 경축사지 내용은 오늘 당장의 현안과 걱정.공약으로 가득하다.

하기야 어렵사리 풀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집안 구석 구석 쌓였는데 실업자든 대통령이든 광복절이라고 속없이 즐겁겠는가.

학생이든 어른이든 어찌 하루라도 오늘의 숙제더미를 잊고 지낼 겨를이 있겠는가.

대신 정치.재벌 개혁에서부터 국민소득. 농어민소득. 연금. 주택보급.수해방지까지 모든 과목을 광복절을 계기로 죄다 다시 복습.예습해야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대통령의 참모들은 이번에도 경축사를 위해 정부 각 부처와 당으로부터 모든 주요 현안들을 모아 대통령의 뜻에 맞게끔 우선순위를 매긴 교과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의 감성 (感性) 을 길어 올리는 진한 연설이 아닌 과제망라식의 교과서이다 보니 "희망과 번영의 새 천년을 열어나갑시다" 라고 앞세워진 메시지가 가슴으로 잘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선거공약을 접할 때처럼. 어차피 우리는 광복절을 느끼는 데 익숙하지 못해왔다.

우리 힘만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던데다 분단.냉전.독재구도가 이어지면서 광복절의 축제성을 처음부터 앗아갔다.

길어 올릴 광복절의 감성을 과연 가꿔 왔느냐고 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워낙 산더미같은 현안과 과제에 치여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광복절의 대통령 경축사는 거의 매번 주요 현안에 대한 당시 집권자의 의지를 담아 밝히는 국정연설이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날을 맞아 세대와 정권을 관통하며 역사 앞에 내놓는 희망찬 메시지가 아니었다.

경축사를 토대로 그나마 미래의 희망 찾기를 해보는 것은 읽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런 뜻에서 이번 金대통령의 교과서적 경축사에 대한 주해 (註解) 를 한번 나름대로 달아보자. 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희망을 끌어내기 위해. 우선, 당대 (當代)에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단임 (單任) 으로 제한된 시간에, 지난 세대로부터 켜켜이 쌓여온 문제들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대통령은 아무도 없다.

짧은 경축사 속에 어차피 모든 현안을 거론할 수 없었던 공간적 제한처럼, 제시된 대안들 역시 시간적 제한 속에 대 (代) 를 물려가며 추진해야 할 해법들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 무슨 결실을 얻으려 성급해하지 말고 다음 세대를 위해 각 분야에서 든든한 벽돌 하나 쌓고 가자는 뜻으로 경축사를 느긋하게 새겨 들어야 희망이 있다.

다음, 정치개혁이 가장 시급한 일인데도 우리 정치가 스스로 개혁해 나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역시 믿을 것은 당대의 정치권이 아니라 유권자인 우리들이라고 받아 들여야 더욱 희망이 있다.

경축사에서 강조된 '돈 안드는 선거' 나 '지역구도의 타파' 는 결국 유권자들이 만드는 것이지 정치자금법을 고치거나 신당을 만드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내년에 국민소득을 1만달러로 끌어 올리고 2002년까지 완전고용을 실현하며 주택보급률 1백%를 달성한다는 것 등은 대통령의 약속이니까 하고 희망을 걸기보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면 이룰 수 있는 전망이라고 받아들여야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 모두 마음이 편하다.

더 크게는 金대통령의 경축사를 다음과 같이 새겨 들으면 어떨까 싶다.

"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광복을 다시 기뻐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의 과제들을 '제가' 라는 주어를 앞세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열했지만 미처 다루지 못한 현안들 또한 많습니다.

짧은 경축사 속에 그 많은 국사를 어찌 다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 하나의 과제보다 희망을 주는 전체의 그림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경축사에 담긴 저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헤아리려하기보다 제 뜻에 동의한다면 각 분야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벽돌 쌓기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언젠가 '우리' 라는 주어의 경축사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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