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와 줄거리 어설픈 만남-14일 개봉영화 '자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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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자살한 귀신들의 모임' 이란 뜻을 지닌 다소 익살스런 제목으로 관심을 끌어 모은 영화 '자귀모' 가 14일 개봉된다.

영혼의 존재를 암시한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영화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팬터지 (환상)에 상당한 비중을 둔 영화다.

이미 이런 류의 영화론 외화 '사랑과 영혼' '천녀유혼' 이, 한국영화 '구미호' '은행나무침대' 등이 있었다.

시공을 초월하는 마법 같은 사랑, 답답한 현실의 공간을 넘어선 환상적 공간…. 비록 비현실인 이야기지만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얘기에 잠시나마 넋을 빼앗기고 싶은 것이 아닐까. 특수효과 등의 적잖은 부담이 따르는데도 영화 '자귀모' 가 기획되고 만들어진 데에는 분명히 관객들의 이런 숨은 욕망을 헤아린 제작진의 야심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사랑하던 연인 (차승원) 의 결별선언에 상처받은 나한수 (김희선)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이승을 떠나 자귀모에 가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교통사고에서 연인을 살려내는 대신 죽음을 택한 순정파 청년 칸토라테스 (이성재) ,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백지장 (유혜정) 을 만나며 각각 희생을 존중하는 사랑과 철저한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한수가 벌이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모험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영화는 기하학적인 모형의 섬들로 둘러싸인 노을 색의 저승세계,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었다가 원상복귀되는 물기둥 등의 묘사에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빌딩 숲을 누비는 귀신들에 초점을 맞춰 스크린에 최대한 현대적인 느낌을 불어넣은 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 효과들을 흥미진진한 볼거리로 만들어 내기엔 이야기 구성이 약했다. 이야기는 코미디와 멜러 사이에서 긴장감을 얻는 대신 중심을 잃어버렸고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했지만 단선적으로 묘사된 다수의 등장인물은 산만함을 더했다.

한편 귀신들이 지하철 벽을 몸으로 뚫고 넘나드는 장면과 검은 옷의 저승사자.황량한 느낌의 저승세계 등의 영상은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했다.

'사랑과 영혼' '시티 오브 앤젤' 등의 영화와 모 보험회사의 광고화면을 연상시키는데 머무른 것이다.

'닥터봉' '패자부활전' 에 이어 이 영화를 연출한 이광훈 감독은 "10여차례 시나리오 작업을 했는데도 이번 영화에서 코미디와 멜러.공포의 균형을 분배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고 말했다.

이 영화의 총제작비는 25억원이다. 컴퓨터 그래픽 등 후반작업에 들인 비용만도 4억원이 넘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앞으로 영화를 제작할 이들에게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고민 과제를 남기게 될 것 같다. 영화는 결코 기술만으로 관객과 교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나리오다. 시나리오가 많은 제작비와 긴 제작기간을 들인 영화적 열정에 조금이나마 상처를 준다면 컴퓨터 그래픽 등 그 첨단기술의 의미도 격하되는 것이 아닐까.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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