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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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1장 조우 ③

"자기 정신 바싹 차려. 우리는 지금 원수들에게 포위당했단 말야. " 저녁을 마치고 서문식당을 나서면서 희숙이가 뇌까린 귓속말이었다. 신접살림을 차린 셋방은 놀며 걸어도 식당에서 불과 오분 거리였다.

박봉환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부치고 부엌 한켠에 미닫이를 끼워 마련한 샤워실로 뛰어들었다.목물을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서자 마주치는 빨랫줄에는 갈아입을 속옷과 타월이 걸려 있었다. 몸은 닦는 시늉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내 희숙도 어느새 잠옷차림이었다.

희디 흰 육덕이 잠옷 밖으로 어른거리는 것을 바라보자, 눈뿌리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다리를 꼬고 거울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으려는데, 느닷없이 눈두덩에 불이 튀었다. 그녀가 봉환의 따귀를 모양있게 갈긴 것이었다.

"똑바로 말해. 아까는 형부하고 언니 놀고 있는 꼴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한주먹 쥐어박아 줬지만,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어. 자기 중국 가서 어떤 년하고 잤어?" 머쓱해진 봉환이가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한번 들썩하며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들렀던 중국에서 배운 대화법이었는데, 대답하기 난처하거나 궁할 때 쓰는 제스처였다.

"니 몽니부리지 말그래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고비마다 파투를 놓노?"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용서할 수 있어. 고개 숙인 남자도 아닌 자기가 한 달 가까이 홀애비로 살면서 여자 생각 안했다면 그게 말이나 돼?"

"그건 그래. 내가 고자도 아닌데, 여자 생각이 굴뚝 같았다는 니 말이 틀린 말이 아잉기라. 그러나 자나깨나 대가리에 떠오르는 여자라카면 오직 희숙이 혼자뿐인데, 설사 욕심이 있었다 카더라도 만년필을 염치없이 내둘릴 수 있겠나? 니가 한 달 가까이나 독수공방하면서 내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카는 거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쑥 빠졌는데, 내가 짐승이라카더라도 돈 주고 여자를 사서 그 짓을 하겠나?"

"애정하고 객지에 나가서 여자하고 잠자는 버릇은 별개라 하던데?" "동대문 생긴 모양을 두고 서울 가본 놈하고 못 가본 놈하고 싸움이 붙으면 못 가본 놈이 이긴다 카디 이게 바로 그 꼴이네. 니가 중국 풍속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기라. 중국에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몸 파는 여자는 없다카이."

"이제 알겠어. 자기 아내는 주문한 물건을 어디서 만들고 어디서 팔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서울로 대전으로 애면글면 찾아다니는 동안 자기는 가는 곳마다 눈깔이 시뻘개져서 몸 파는 여자만 찾았다는 얘기 아냐? 더럽고 치사해 정말. 그 더러운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것만 좋아서 내가 답싹 안길 것 같애?"

"야가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언제 여자를 찾아나섰다카도? 내 말귀를 그렇게 몬 알아 듣겠나? 중국의 풍속이 한국처럼 문란하지 않다는 것을 이바구하다 보니 천상 내가 여자 가랭이만 찾아댕긴 꼴이 됐뿌렀는 기라. 니 봐라. 내가 그런 짓이나 하고 돌아댕겼다카면, 야가 시방 코부라매치로 흥분해 가지고 이렇게 꼬대기 서 있겠나?" 희숙은 고개를 들어 박봉환을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정말이야? 자기 깨끗하다는 거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내가 거짓말을 밥먹듯 해도 이 세상에서 니한테만은 거짓말 안한다카이. " 애저녁에 봉환의 진실을 알아냈으면서도 희숙의 굳어진 안색은 좀처럼 풀어질 줄 몰랐다.

그것은 강다짐을 받아냈다 해서 금세 해죽거린다면 먼 장래에는 호미로 막을 일이 부삽으로도 못다 막을 일이 닥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표정은 흐트러뜨리지 않고, 앉은 채로 걷는 특유의 오리걸음으로 전등 스위치로 다가가 할끔 뒤돌아보며 물었다.

"불 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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