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못찾는 젊음의 자화상-엄우흠 '푸른광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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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신예소설가 엄우흠 (31) 씨가 장편소설 '푸른 광장에서 놀다' (전2권.실천문학사.각권7천원) 를 펴냈다. 신예라고는 하나 그의 데뷔는 서울대 독문과 재학중이었던 8년 전. 출판사에 무작정 투고했던 것이 소설가 김영현씨의 추천으로 출간, 3만부 남짓 팔린 '감색 운동화 한 켤레' 의 작가다.

노동해방의 전망을 제시하는 노동소설의 도식성에서 비껴나 노동자부부의 일상을 상큼하게 묘사했던 필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번 신작은 한결 반가울 터다.

'푸른 광장에서…' 는 87학번 대학생이자 현재 서른 무렵인 '모준' 을 주인공 삼은 일종의 성장소설. 모준의 청춘은 우리 문학에서 곧잘 단절적으로 인식되곤하는 80년대/90년대의 경계에 걸쳐있지만, 작가는 진솔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무기로 소위 '후일담소설' 이 빠지기 쉬운 자기연민의 함정이나 '신세대소설' 의 거품투성이 함정을 재치있게 돌파해나간다.

이야기의 시작은 소설을 쓰겠다는 꿈만 가졌을 뿐, 하릴없는 대졸백수 신세인 모준이 학교 앞 자취방을 떠나 서울 강북의 산동네 '수미동 (須彌洞)' 으로 낙향하면서부터. 애아버지이자 횟집주인이 된 '학목' , 자판기외판원 '종찬' , 학교주먹패 두목에서 단란주점 상무로 변신한 '승복' 등 모준에 앞서 백수건달 시절을 맛본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있다.

여기에 밴드의 꿈을 접고 트럭운전을 하는 군대친구 '광화' , 늘 조숙하고도 초연한 태도로 반항적 행동을 거듭하는 '민우' , 반복되는 연애 외에는 이기적인 무심함으로 일관하는 여동생 '윤' , 직장이라고는 단 3년 미술교사를 해봤을 따름인 아버지, "산동네 출신이라 데모한단 소리 안듣게 하라" 고 독특한 품위를 내세우는 어머니 등 90년대형 감수성을 입고 나온 다채로운 인물들의 생생함은 모준의 회상이 과장과 미화, 혹은 자조와 엄살을 자제하면서 80년대/90년대의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원동력이다.

우장춘박사를 들먹이며 새벽 세 시까지 좌판을 지키는 과일노점상, 남편의 바람끼를 무신경한 장사태도로 화풀이하는 정육점 주인 등 작가가 그려낸 '수미동 사람들' 에서 마치 양귀자소설 '원미동 사람들' 을 연상시키는 온기와 재능이 묻어나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돈이 떨어지면 횟집 일이든 전기공사판 조수든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외에는 시립도서관에서 소일하는 모준의 현재는 언뜻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정작 모준은 이 무기력의 여유 덕분에 수미동 산동네에서 보낸 10대 시절과 신림동 대학촌에서 보낸 20대를 무리없이 연결해 나간다.

군대생활조차 정신병동에서 보낸 모준의 섬세한 내면에서는 다채로운 사건들이 벌어졌다 스러진다.

작가는 일이든 연애든 이렇다할 성취를 기대하는 독자를 실망시키는 대신 모준의 출구가 꿈과 현실, 백수와 예술가를 넘나드는 유희정신뿐임을 확인시키는 환상적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그 새 단편 한번 발표한 일 없다가 불쑥 자전적 성격 짙은 소설을 내민 데 대해 작가는 "30%는 자전이겠지만, 1년여의 구상을 거쳤다" 고 대꾸한다.

대학졸업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쓰기에 몰두, 전업작가의 고행에 어느 정도 단련돼 있음을 확인시킨 그는 "앞으로 쓸 얘기는 좌충우돌하는 '미지의 세계' 일 것이란 점에서 나 자신도 설렌다" 는 말로 8년만에 다시 출발선에 선 소감을 말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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