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연립정권의 산수와 무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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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각책임제 개헌의 유보로 벌어진 정계의 파문은 보기가 민망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대부분의 국민이나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실현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개헌의 약속이었다.

거듭된 여론조사 결과는 한결같이 내각제보다 대통령제를 선호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다수 의견이었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당인 국민회의쪽도 애시당초 내각제에는 전혀 감격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내각제 유보를 지금 다그치게 따져 비난하고 있는 야당인 한나라당도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내각제를 지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그쪽도 다수의견은 대통령제를 선호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각제 유보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유보 결정의 '실체' 보다 그 '절차' 혹은 그 '모양새'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지고 보면 내각제 문제가 이처럼 말썽을 빚어 세기말의 한국정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지난번 대선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1999년 말까지 개헌을 하겠다는 '잘못된' 대선공약을 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로서는 할 뜻도 없고 자민련으로선 할 힘도 없는 개헌을 약속했으니 잘못된 공약이랄 수밖에…. 그러나 잘못된 것은 내각제 공약만이 아니요, 그 공약만 위반한 것도 아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대선에 승리할 경우 연립정부를 50 대 50의 비율로 구성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그것도 지킬 수 없고, 지킨다면 오히려 우스운 대선공약이었다.

양당의 의석수가 크게 벌어져 비슷하지조차 않은데 똑같은 지분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유럽에서는 수많은 나라에서 어느 당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못얻어 단독 정권을 세우지 못할 때엔 복수의 정당이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것이 오랜 관례가 돼왔다.

그럴 경우 연립정당의 의석수 비율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그에 앞서 정부의 향후 정책에 대해선 연립정당의 대표들이 충분한 토론과 협의를 거쳐 분야별로 합의된 내용을 두툼한 문건으로 공개하곤 한다.

속칭 DJP의 연립정권은 그 출범에 앞서 국방.대북정책, 재정.경제정책, 사회복지정책 등 현안에 대해서 심도있는 논의와 이견의 조정을 거쳐 어떤 합의를 이룩했다고 하는 보도를 우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공동정부의 구성은 50 대 50으로 하고 99년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는 종이 한장의 약속이 연정 협상의 결과로 알려진 것이 전부였다.

참으로 주먹구구식 협상이라고나 할 수밖에…. 오직 정권쟁취라는 일의적 (一義的) 목적에 큰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할 뿐 정권 장악후의 구체적인 정책쯤은 '준비된 대통령' 에게 모두 일임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거의 40년만에 여야 정권교체를 기도한 국민회의쪽이 지난 대선에선 더욱 다급했고 갈급했을 것이다.

제3정당인 자민련이 그를 도와 건국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선거혁명을 성사시켰다.

자민련의 기여,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공동정부를 구성할 소수당이 다수당과 대등한 지분을 요구하고, 더욱이 다수당으로선 내키지 않을 내각제개헌까지 약속케 한 것은 연정협상에 있어 의석수의 산수를 무시한 무리수였다.

갈급한 국민회의를 몰아붙여 마음에 없는 내각제 개헌을 공약토록 한 것은 JP가 유행시킨 말을 빌리자면 캐스팅 보트를 쥔 소수당의 다수당에 대한 '몽니' 부림의 시작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대선 전의 급박한 상황이었다곤 하더라도 제휴정당의 '몽니' 를 합리적인 설득으로 달래지 못하고 지킬 뜻도 없으며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헤프게 국민 앞에 내놓은 국민회의의 잘못은 크다.

하물며 그렇게 해서 발표한 대선공약을 위배하고서도 국민앞에 사과는 커녕 경위조차 해명하지 않고 있는 잘못은 더욱 크다.

많은 국민은 내각제가 좋아서 내각제유보에 분노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내각제에 반대하고 있는 국민도 내각제 유보결정에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부.여당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에 있어선 정책결정의 '실체' 만이 아니라. 그의 '절차' 나 '모양새' 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그런 정치는 조만간에 그에 상응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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