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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3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39. 연금되다

17일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하고 24시간이 지났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쪽이나 저지하려는 쪽 어느 쪽도 사태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쿠데타군에 원대복귀 명령을 내렸으나 윤보선 (尹潽善)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위한 부대동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쿠데타 진압에 나서야 할 장도영 육참총장은 전날 이미 혁명군사위원장직을 수락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해군과 공군총장, 해병대사령관은 그때까지 가타부타 의사표시가 없이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각수반인 장면 총리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서울시내에 진주한 혁명군 병력은 미국측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모두 1천7백명에 불과했다. 초조해진 박정희 장군은 육군사관생도들에게 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해 5.16쿠데타의 정당성을 추인받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육사생 시가행진은 쿠데타군과 반쿠데타 세력 간 힘의 균형을 가늠하는 추 (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 동원을 담당한 사람은 박창암 (朴蒼岩) 대령이었다.

이북 출신으로 얼마전까지 육사 생도부대장을 맡고 있던 朴대령은 일찍부터 혁명군과 선을 대고 있었다.

朴대령은 갖은 협박과 공갈로 시가행진을 강요하려 했으나 생도들은 김익권 (金益權) 생도대장을 중심으로 교장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오후 10시쯤 됐을까. 교장실에 앉아 있는데 면담 신청이 들어왔다. 잠시후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 세명이 와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세명 중 한명은 앞 이마가 훤했다.

세 사람은 자기들이 육사 11기 졸업생이라고 밝힌 다음 "사관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허가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사관생도들을 정치도구화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 설사 후배들이 나서려고 해도 선배들이 말려야지 후배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크게 꾸짖어 보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들 중 두명은 전두환 (全斗煥).이상훈 (李相薰) 대위였다. 전두환 대위는 이때 서울대 예비장교훈련단 (ROTC) 교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때까지 육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11기생들은 쿠데타 지지를 유보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에 있는 11기생들의 동향은 어떤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육본에 가 육사생 시가행진이 부당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로 하고 나는 길을 나섰다.

육본 총장실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장군과 장도영 총장 두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두 장군에게 사관생도 시가행진이 적절치 못함을 거듭 역설했다.

바로 그때 박창암 대령이 총장실로 불쑥 들어서더니 박정희 장군을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朴장군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교장 얘기와 보고가 서로 맞지 않는데…" 라고 한마디 하더니 휑하니 다시 나가버렸다.

나는 朴장군이 말한 '다른 보고' 란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마침 문재준 대령이 들어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는 포병단을 이끌고 쿠데타에 참가하고 있었다. 6군단장 시절 포병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나는 文대령을 잘 아는 처지였다.

文대령은 나를 총장실 밖으로 이끌더니 "지금 상황이 유동적이라 불안한 상태입니다. 교장님은 아무 말씀 마시고 육사로 빨리 돌아가 주십시오" 라고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팔을 잡힌 채 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대위 세명이 나타나 우리에게 권총을 겨누더니 "거기 서!" 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주춤하는 사이 이들은 내 옆에 서 있던 文대령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앗고는 마구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박창암 대령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나를 육본 일반참모 회의실로 이끌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朴대령은 "사적으로 존경합니다만 공무를 위해선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하더니 다짜고짜 나를 방에 가두어 버렸다.

강제 구금이었다. 한 사람이 카빈 총을 들고 출입문을 지키기 시작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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