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파수꾼' 자임 자크 랑 佛 前문화장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프랑스의 유력 정치인인 자크 랑 (59) 은 하원 외교위원장이라는 현직보다 81년부터 93년사이 무려 10년간 역임한 문화장관으로 불려지는걸 좋아한다.

문화적 다원성을 강조하는 그의 '열린 문화' 철학은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포용력있는 프랑스 현대문화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됐다. 그런 그가 얼마전부터 한국영화산업의 '파수꾼' 을 자처하고 나섰다.

'스크린쿼터' (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 철폐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 한국.미국 등 관계국을 상대로 자발적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시장을 겸하고 있는 프랑스 중서부 블르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가 26일 중앙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 프랑스 정치인으로서 한국영화산업 보호에 발벗고 나서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프랑스 영화계의 지인 (知人) 들로부터 한국의 스크린쿼터제가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를 작년에 우연히 처음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과 미국, 프랑스 관계장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또 기회있을 때마다 유럽 영화업계 관계자들에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

-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 이어 잭 발렌티 미 영화협회회장에게도 편지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보름전쯤에 보냈습니다. 현재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발렌티 회장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인데다 미국정부 쪽에도 목소리가 큰 인물입니다. 한국영화인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보다 활발한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

- 미국의 스크린쿼터제 폐지 내지 축소 압력을 어떻게 보십니까. 문화 패권주의라는 시각도 있는데.

"물론입니다. 본질적으로는 경제 패권주의라고 할 수있습니다. 한국정부가 경제.통상분야에서 미국과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건 당연하며 정당한 것입니다. 부당한 것은 미국이 한국정부의 선의를 이용해 한국영화산업을 죽일 위험이 있는 잘못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 패권주의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문화 양식 (樣式) 을 해치는 문화 패권주의를 동반하고 있는 셈입니다. "

- 경제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모든 가치기준이 '경쟁력' 으로 귀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문화경쟁력과 문화주권이 과연 양립가능한 것일까요.

"모든 국민은 고유의 문화와 역사, 이미지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적 다양성과 다원성은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개방주의의 바탕 위에서 꽃필 수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문화적 개방' 이 아니라 '창작의 자유' 에 있습니다. 교역의 자유가 창작의 자유를 파괴하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걸 절대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

- 프랑스에는 스크린쿼터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국내영화산업 보호를 위한 다른 복잡한 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영화와 달리 텔레비젼 방송에는 쿼터제가 있습니다. 민영.공영방송을 막론하고 유럽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전체 프로그램의 60% 이상이어야 하고 특히 그중 50%는 프랑스 제작물이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지키도록 돼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절반 정도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영화입니다. "

- 오는 11월 미 시애틀에서 뉴라운드 협상이 시작됩니다. 자유교역에서 문화산업을 예외로 인정하는 '문화 예외원칙' 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까.

"분명 미국은 이 원칙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올 겁니다. 또 한바탕 투쟁이 불가피하겠지요. 하지만 이 원칙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모든 문화적 소산은 독창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 각각이 독특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소산은 체질이 허약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산품에 적용하는 것과 똑같은 시장 기준으로 문화적 소산을 대우한다면 각국의 고유한 문화는 모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가격경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힘있는 나라의 문화만 살아남게 되겠지요. 따라서 이는 교역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입니다. "

- 프랑스가 고수하려는 '문화 예외 원칙' 과 관련해 프랑스 역시 문화패권주의의 또다른 축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프랑스는 패권주의의 또다른 축이 아니라 일종의 견제세력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각국이 문화적 자유와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패권주의적 질서는 프랑스, 미국, 일본 그 어느 나라에 의한 것이든 옳지 않습니다

<자크 랑 약력>

▶1939년 9월 프랑스 동부 보즈지방 미르쿠르 생

▶시앙스포 (파리정치대학) 법학박사.변호사

▶낭시 및 낭테르대학 법학교수

▶문화장관 (1981~1986)

▶하원의원 (1986~)

▶문화, 통신, 혁명2백주년 기념사업, 교육장관 겸임 (1988~1993)

▶블르와 시장 (1989~)

▶하원 외교위원장 (1997~)

▶세계문화협회 회장 (1999~)

대담= 배명복 파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