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EBS가 과외 채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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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EBS에서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EBS의 앞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당장은 새 사장 선임이 관심사다. 현재 난항을 겪고 있다. 이달 초 방송통신위원회의 1차 공모에서 적격자를 찾지 못한데 이어 2차 공모 후에도 잡음이 이어지고 있다.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 1차 공모 당시 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관계자는 “1차 심사자가 2주 만에 열린 재공모에 후보로 나서는 것은, 타 후보와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지 않나”고 지적했다.

핵심은 행정적, 혹은 절차적 인선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EBS의 콘텐트, 혹은 지향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단 최근 공모 과정을 지켜보는 EBS 구성원 사이에는 자괴감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10일 1차 공개심사에서 유력 후보들이 그간 고품격 다큐멘터리나 교양물을 제작해온 EBS의 성취를 깎아 내린 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부 후보는 “아침에 EBS를 켜니 다큐멘터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내가 사장이 되면 이런 프로들을 없애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EBS는 교양 아닌 (입시)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EBS는 고단한 역사를 가진 방송이다. 재원·위상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아왔다. 수장이 바뀔 때마다 방송이 먼저냐, 교육이 먼저냐, 혹은 사회·평생교육이냐 입시교육이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EBS는 1997년 교육부에서 독립했고, 2000년 교육방송공사로 지위가 격상됐다.

최근 수 년간 EBS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2009년 방통위 방송대상을 수상한 ‘한반도의 공룡’을 비롯해 ‘아이의 사생활’‘안데스’ 등 유수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우리 다큐멘터리도 BBC·NHK에 못지 않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다큐프라임’을 동일 시간대에 띠 편성해 다른 공영방송에 충격을 줬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페이스 공감’ 같은 문화프로가 빛났다. EBS는 지상파로 평생교육, 사회교양을 강화했고, 케이블로는 수능, 중학·직업교육, 영어를 특화했다. 미국의 유일한 공익 교육방송인 PBS가 부럽지 않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번 사장 선임 과정 역시 EBS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방통위가 ‘EBS를 통한 사교육비 10% 절감’을 밝혔지만, 그렇다고 EBS가 사회교육채널로서 쌓아온 성과를 무너뜨려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e-러닝의 핵심은, 쌍방향·개인화·맞춤 서비스가 가능한 케이블·인터넷·VOD 서비스이지, 지상파를 통한 ‘EBS 과외채널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교육비 절감은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다. 하지만 ‘한반도의 공룡’ 같은 프로그램의 교육적 효과를, 단지 입시교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부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입시교육 만능’의 비교육적 발상 아닐까.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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