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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스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3호 33면

디나 메릴(84). 할리우드 여배우다. 광적인 영화팬이나 알까, 일반인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왕년엔 스펜서 트레이시, 캐서린 헵번 등과 공연하기도 했다.
로저 벌린드(78). 브로드웨이의 연극 연출가다. 토니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을 정도로 그 바닥에선 알아주는 실력파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마샤 존슨 에번스(62). 미국의 여성 해군장성 출신으로 미 적십자사, 걸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지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자료가 무수하게 뜰 만큼 유명 인사다.
이들에겐 공통의 접점이 있다. 한동안 같은 조직에서 보수를 받으며 일했다는 점이다. 바로 지난해 파산한 리먼 브러더스에서다.

금융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이들, 리먼의 사외이사였다. 특히 디나 메릴은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이사로 있었다. 이 기간 중 금융기법에 대한 조언을 하거나, 사내 위험관리에 관해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른 두 사람도 자기 분야에선 최고였을지 몰라도 금융과는 노는 물이 달랐다.

리먼의 이사회, 대개 그렇게 구성됐다. 파산 직전 10명의 이사 중 9명이 현업에서 은퇴한 사람이었고, 4명이 75세 이상이었다. 금융업 경력자는 딱 두 명이었는데, 둘 다 80대로 한 세기 전의 금융인이었다. 리먼의 부사장 출신인 로런스 맥도널드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첨단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상식의 실패』) 사람이 나쁘거나, 의도가 불순해서가 아니다. 그들로선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사회의 기능 부전은 금융사엔 치명적이다. 최고경영자(CEO)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먼의 리처드 펄드 회장이 위험한 투자를 계속하는데도 이사회는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했다. 아니, 그냥 지켜보는 게 그들에게 주어진 진짜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내 리스크 관리위원회도 펄드가 통제했고, 대출심사위원회도 펄드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펄드가 예스를 원하면 ‘예스’, 노를 바라면 ‘노’라고 했다고 한다.

복기해 보면 궁극적으론 사람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나 싶다. 금융사의 생사가 엇갈리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리먼이 망한 건 시스템이 엉성해서도, 제도가 안 갖춰져서도 아니다. 시스템이나 제도도 결국 사람이 만들고 운영하는 거 아니겠나. 특히 중요한 게 CEO인데, 리먼에선 ‘CEO 리스크’가 너무 컸던 셈이다.

CEO에서 비롯되는 위험은 리먼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내 금융 CEO들 사이엔 이른바 ‘3년차 증후군’이란 게 있다. 임기가 다가오면 연임을 의식해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영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몇몇 은행의 자산 증가세는 행장의 임기 말과 얼추 맞물려 있다. 연임에 성공하면, 그 뒤엔 수습 국면에 들어간다. ‘정도(正道) 경영’ ‘내실 다지기’ 등이 이때 나온다.

그러다 보니 외형경쟁과 내실경영이 2~3년을 두고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숨어 있던 ‘부실 폭탄’이 터지면 경영이 휘청한다. 그래서 금융업을 ‘돈 장사’이면서도 ‘사람 장사’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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