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속 ‘초라한 시골 늙은이’가 주는 신선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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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35면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얘기가 있다. 검사의 공소 제기에 따라 시작된 재판 절차는 판결로 끝난다. 공소장은 재판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라 간단명료해야 한다. 판결문도 유·무죄의 결론과 이유를 공표하는 것이어서 무미건조한 문체가 이상적이라는 게 우리 법조계의 상식이었다. 섣부른 주관적 해석을 경계한 것이었다. 감정적 표현은 금기시됐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보도된 한 판결문을 보면서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필자가 놀란 부분을 간략히 인용하면 이렇다. 우선 검찰 수사가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됐다는 피고인 측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이 사건 알선수재는 당시 현직 대통령의 형이던 피고인이… ○○증권을 인수하도록 알선하고… 엄청난 금품을 수수한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 사건이다’라고 규정했다.

이어 ‘○○캐피탈 측의 노회한 상술과 피고인들을 비롯한 관계인들의 추악한 탐욕이 얽히고설킨 데서 풍겨 나온 악취가 너무나 지독한 나머지 수사기관의 수사를 피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지,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권력형 비리 수사의 단초를 열 목적으로 (검찰 수사가) 착수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매우 적나라한 표현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1심 형량을 줄여 주면서 ‘피고인은 이제 해가 떨어지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 신세 한탄이나 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시골 늙은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엄숙한 형사법정을 떠나 소박한 단편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보기 드물게 솔직한 문장이다.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으나 설득력은 매우 강하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2건의 판결문을 본 적이 있다. 모두 일본 사례다.
첫째는 검사의 비극으로 귀착된 데이진(帝人) 사건이다. 일본 검찰의 여명기인 1934년에 국책 타이완은행이 담보로 잡은 상장회사 주식을 일본 정·재계의 실력자들에게 헐값에 처분해 특혜를 줬다는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국회의 고발에 따라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대장성 차관과 국장, 상공대신과 은행 경영진 등이 기소됐다. 그 여파로 사이토 미노루(齊藤實) 내각이 무너졌지만 3년간의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피고인 대부분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1심 판결문을 보면 ‘검사의 주장은 물속의 달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적혀 있다. 일본에는 원숭이가 등나무 줄기에 매달려 물 위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애쓰는 모습을 묘사한 전통 그림이 있다. 그처럼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것을 열심히 건져내려고 한 것이 검사의 기소라는 준엄한 비난이었다.

이에 법무상이 ‘대국적 견지에서 항소를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냄으로써 검찰은 항소해 다퉈볼 기회도 갖지 못했다. 주임검사 구로다(黑田)를 비롯한 3명의 검사는 정신적 피로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검찰에겐 참혹한 결과였다.

둘째는 일본 검찰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는 쇼와전공(電工) 사건이다. 1948년 대기업인 쇼와전공이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당시 총리대신 아시다(芦田)와 대장대신 등 10여 명의 국회의원에게 뿌린 것을 도쿄지검이 적발했다. 현직 총리가 체포·기소된 큰 사건이라 공판 과정은 격렬했다. 아시다는 1심부터 무죄가 선고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특수 검찰의 기틀을 다진 수사로 높이 평가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은 ‘검사가 아시다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해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기소했다. 정치적 모략이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단호하게 검찰의 입장을 옹호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피고인의 주위에 어떤 부정행위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국민적 의혹이 있었고, 이런 사회 정세 하에서 만약 검찰 당국이 범죄 혐의가 있음에도 불문에 부쳤다면 세인의 의혹은 더욱 깊어져 검찰 당국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공명정대한 태도로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검사의 기소를 정치적 음모라고 하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적혀 있다. 아시다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기소 역시 검사가 마땅히 해야 할 직무의 수행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제 우리 법원이 과감하고 신선한 문장으로 판결을 쓰기 시작했다는 뉴스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기소된 사건이 전부 유죄라면 법원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기에, 과감한 무죄 판결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다만, 그 기회에 검사의 공소 제기가 필요하고 타당한 것인지도 잘 따져서 형편없이 잘못된 것이라면 추상같은 질타가 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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