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서두르는 남…휘두르는 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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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해에서 남북한 해군함정들이 포격전을 벌이는 위기상황에서 동해에서는 금강산 유람선들이 아무일 없다는 듯 유유히 북으로 떠났다.

비대칭 (非對稱) 의 극치였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비대칭이 오래 갈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북한은 결국 서해에서 당한 굴욕을 동해에서 설욕하려는 듯 순수한 관광객을 희생양으로 붙들어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을 심각한 궁지로 몰고 있다.

북한의 처사는 종잡을 수가 없다.

서해의 무력충돌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은 계속 개방한다는 입장을 확인하고는 바로 30대의 주부를 억류했다.

문제의 관광객이 말조심을 더 하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그녀의 말은 벌금을 물릴 사안 (事案) 은 될지 몰라도 억류의 조건은 안된다.

그녀가 애당초 북한 사람의 유도질문에 말려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북한은 또 서해사태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北京) 의 차관급회담을 예정대로 열자고 하고는 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했다가 어렵사리 열린 회담에서 당초 합의한 의제 밖의 문제를 제기해 사실상 사보타주를 했다.

북한은 지금 일종의 외교적인 게릴라 전술을 펴고 있다.

상대방이 주는 것을 받아서 상대방을 친다.

홍길동 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강온 (强穩) 양면작전이 다채롭다.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하다.

金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팀이 북한의 게릴라 전술과 진의 (眞意) 를 알고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하고 있는가.

대답은 분명한 '노' 다.

우리에게는 정책과 전략의 유연성이 부족하다.

서해사태가 일어났을 때 정부와 현대측은 관광객들의 신변안전을 최대한 고려해 관광선 출항에 신중했어야 했다.

북한의 보복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양일 것인가를 알 수 없을 뿐이었다.

베이징 회담이 합의됐을 때 金대통령은 뭐라고 했던가.

그는 총리급회담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임동원 (林東源) 통일부장관은 또 뭐라고 했던가.

그는 장관급회담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통일부장관의 생각이 그렇게 안이 (安易) 했으니 누가 관광선의 계속 출항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이미 여러차례 말한 것을 되풀이해야겠다.

첫째, 국민의 정부는 북한이 하는 말을 너무 쉽게 믿는다.

그 이유는 국민의 정부가 북한이 보내는 각종 신호 중에서 좋은 쪽, 유리한 쪽, 긍정적인 쪽만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무엇이 그리도 급한가.

법적인 통일을 유보하고 남북이 평화공존하는 사실상의 (de facto) 통일을 햇볕정책의 바탕으로 결정한 것은 현실적이고도 성숙된 자세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성과를 서두르는 정부와 법적 통일을 유보한 정부가 과연 동일한 정부인가 의심이 든다.

북한은 남한 사회를 휘두르는 데 신이 난 것 같다.

북한은 아주 성공적으로 남쪽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여야를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북방한계선 (NLL) 문제로 외교통상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갈라놓고 있다.

마치 우리의 정치와 사회의 안정과 불안정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북한이 쥐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은 지금은 햇볕정책에 반대다.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의 재개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북한은 대외정책의 초점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실리추구에 맞추고 있다.

경제만 고려한다면 남북 긴장완화에서 얻을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지만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은 그들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햇볕정책은 지속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안보팀 사람들에게 차라리 휴가라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북한에 이것 저것 주겠다고 제안하는 이니셔티브를 당분간 보류하고 북.미관계의 진전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을 담은 페리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라도 말이다.

야당도 초당적인 입장에 서서 햇볕정책을 정쟁 (政爭) 의 제물로 삼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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