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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8. 하늘의 발길질에 차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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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 이감되던 92년 봄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봄비 속에 활짝 핀 산벚꽃이 하얗게 하얗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침침한 독방에 가두어져 창살에 머리를 기대고 떨어지는 꽃잎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끝이 안보이는 무기징역, 스스로 삭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멘트 바닥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후둑후둑 떨어져 내렸다.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먹지도 걷지도 못한 채 나는 무섭게 앓았다.

왼쪽 얼굴에서부터 목으로 피부가 짓무르더니 거의 반신마비 상태가 되었다.

긴 수배 생활의 긴장과 고문 후유증, 1년간의 첨예한 재판과 지나친 밤샘 공부가 병이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절대 진리가 무너지고 내 신념의 지향을 잃어버린 절망감이 온몸 마디마디로 아프게 엄습해온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싸늘한 감시의 눈빛만 번득이는 엄중 격리의 벽 속.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이 하나 없는 벽 속에서 급속히 눈이 멀어져 책도 볼 수가 없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젠 눈마저 빼앗아 가십니까! 나는 찬 바닥을 뒹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무덤 속 같은 독방에서 벽을 마주하고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날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봄날. 앞이 보이지 않는 봄날.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

음식을 끊고 찬물과 소금만 먹으며 긴 단식을 했다.

하루하루 몸이 마르고 눈물이 마르고 세상과의 인연도 말라 갔다.

나는 마른 꽃씨처럼 허허로운 몸으로 다시 일어서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은 차츰 환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벽 앞에 좌정한 채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수인 하나가 늘 "박 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하면서 내 방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그 날 따라 그 소리가 느닷없이 천둥처럼 울려오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절 받으십시오" 란 말은 "저를 받으십시오" 란 말이었구나. 저토록 자기를 낮추어 절하는 사람을 내 안에 받아들이려면 나도 낮아지고 열려지고 너그러운 품이 되어야 하겠구나.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이는 물둥지 (저수지) 는 낮은 곳에서 자기를 부드럽게 열고 있지 않느냐. 높은 곳에서 나를 내세우고 주장하고 닫혀 있다면 내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도 그의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가 없구나. 그래서 "절만 잘 하면 깨친다" 하고 "하심 (下心) 이 참 마음이다" 라고 하는구나. 그날부터 나는 벽 앞에 앉아 눈 먼 눈을 감고 '말' 을 화두삼아 깨쳐나갔다.

'터무니 없다' 는 말은 '터 (땅)에 무늬가 없다' 는 뜻이 아닌가.

사람의 역사는 땅의 역사이니, 수백년 된 고향의 정자나무와 옛 우물과 논밭에는 조상의 숨결과 삶의 이야기가 무늬 지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땅에서 뿌리 뽑힌 채 아스팔트 위에서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며 빨리 짓고 금세 허무는 우리의 삶은 정말 '터무늬' 없는 것일 수 있겠구나. '나쁜 사람' 이란 말은 '나뿐인 사람' 이 아닐까. 나쁜 사람, 악한 사람, 죄짓는 사람들의 밑바탕엔 더불어 사는 이웃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나 하나 뿐' 이란 마음이 깔려 있는 것이리라. '알뜰하다' 는 말은 '알들하다' , 다시 말해 속에 알이 들어찬다는 말인가 보다.

부지런히 몸을 많이 쓰고 아껴 쓰고 나눠 써야 '알들 (알뜰)' 한 살림살이가 될 터이니. '아내' 라는 말은 '안해' 라는 뜻이구나. 안해는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인 거야. 해는 본디 밝은 것인데 안해의 얼굴이 그늘지고 찌푸려져 있다면 그 먹구름은 무엇인가.

바로 남편 놈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세상의 남편들은 하늘의 맑고 흐림을 살피듯 늘 '안해' 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해야 하리라. 아내 역시 자기 안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주위를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햇덩이처럼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눈이 멀어버린 탓에 나는 우리말의 속뜻을 하나 하나 깨달아 가는 재미로 절망스런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다.

우리말 속에는 이 땅에서 살아내신 선조들의 생동하는 삶의 경험과 지혜와 정서가 꽃씨처럼 응축되어 있음에 눈뜨게 되었다.

'시 (詩)' 란 문자 그대로 '말씀 (言) 의 사원 (寺)' 이기에 시인은 말을 경배하고 말로써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마도 말로 살아가는 팔자를 타고난 시인인지라 말을 하되 내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깊이 깊이 묻고 물어 싹트는 말이 아니면 쓰지를 말라. 내게 이런 깨우침을 주기 위한 하늘의 시련이었던가.

눈이 뭔지 거의 백일이 다 되면서부터 차츰 희미하게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늘 그랬다.

내가 잘 나갈 듯하면 하늘은 여지없이 내 옆구리를 차 쓰러뜨리곤 했다.

내 인생에서 짧디 짧은 행복이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하느님의 발길질' 이 나를 길고 긴 고생길로 밀어 넣었다.

내 앞에는 항상 고생문이 환하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고 (苦) 는 생 (生) , 괴로울 '고' 태어날 '생' 이 아닌가.

나에게 고통은 새로운 창조의 문이기도 했다.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 나는 더 맑아지고 정신의 키가 커지곤 했다.

고생은 나의 다정한 친구이고 나를 키운 엄정한 스승이었다.

고생은 내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단지 집행유예될 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게 없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날 내가 잘못 쓴 답안지를 제대로 고쳐 쓸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오늘의 고통을 불러온 원인을 정직하게 성찰하면 이 고통의 크기만큼 나는 더 깊어지고 사랑이 커진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새로운 고통이 닥쳐오면 미리 통박부터 굴려본다.

이 고통을 겪어내면 내가 얼마나 더 커질까. 이번에 어떤 선물을 주실까 하고 재어보는 것이다.

지혜란 통박을 크게 굴릴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어느 것이 더 실속있고 오래 가는 이익인지, 무엇이 진정한 이익인지를 알아채는 능력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붓다.간디와 같은 성인들은 큰 고통 속에서 큰 통박을 굴렸던 분들이다.

그 분들은 가장 크고 멀리 가는 이익에만 집착했다.

'영원한 생명' 을 욕망했기에 작은 욕심에 걸림이 없는 대 자유인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생을 두고 끝까지 치열한 '사랑의 투혼' 으로 살아낸 혁명가들이 아니었던가.

지난 시대나 지금이나 나는 주제넘게도 엄청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나에게 또다시 어떤 고통이 다가올지 몰라도 나는 진리를 깨치고 진리를 살고 싶다.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이 빠른 변화 시대에 참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새로운 진보란 무엇인지, 나는 정말 알고 싶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을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다.

그리하여 이 고통에 찬 세상을 좀더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 함께하고 싶다.

이 크나큰 욕심이 오늘도 나를 끝없는 배움의 열정으로 살아 있게 하고 사람들과 연대하게 하고 좁은 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내 앞길에는 여전히 고생문이 환하게 열려 있지만 나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예감과 그 떨림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꽃을 찾아 순례하는 나비처럼 화려하고 환상적인 곤충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나비의 일생은 알에서 애벌레로, 다시 번데기로, 성충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처절한 탈바꿈의 연속이다.

한 시절 내내 애써 이룬 자기 몸을 기꺼이 껍질로 벗어버리고 고생에서 고생으로 이어지는 나비의 생애. 저 미물인 벌레 한 마리도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초주검이 될 정도로 마지막 힘을 다해 질긴 고치를 찢어내야 한다지 않는가.

한 곤충학자가 안타까운 심정에 칼로 고치를 살짝 찢어주었더니 그 나비는 며칠을 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런 것이다.

고 (苦) 는 생 (生) 인 것이다.

캄캄한 독방 벽 속에서 눈을 잃어버렸던 백일이 지나고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하던 환희의 그 아침. 창살 너머 언덕에 피어난 패랭이꽃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짙푸른 풀잎 사이로 피어난 선분홍 꽃얼굴. 더없이 맑고 평화로운 얼굴. 그래서 패랭이 꽃말이 '평정 (平靜)' 인 것일까. 그러나 패랭이꽃이 피어나는 자리는 평지가 아니라 가파르고 위급한 비탈 자리였다.

위급과 평정, 고통과 창조가 하나인 그대로 피어나는 꽃. 오늘 비록 우리 삶의 자리가 험할지라도 저 패랭이꽃의 해맑은 얼굴로 살아 있기를. 우리 앞길에 고생문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이 고통을 승화시켜 환한 미래의 문을 열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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