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세계를 보는 구조조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도쿄 (東京)에선 매년 5월 '아시아의 미래' 라는 국제회의가 일본경제신문 주최로 열리고 있다.

청중 입장권이 무려 7만5천엔 (이틀간) 인데도 자리가 꽉꽉 찬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전 총리를 비롯,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 등이 단골손님들이고 아시아 지역의 다른 누구도 초청만 받으면 선뜻 날아온다.

일본총리가 만찬연설을 하는 등 국가적 행사나 다름 없다.

이름만 거창한 국제통화기금 (IMF) 정기총회 같은 것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조찬행사를 시작으로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끝나는 빈틈없는 운영으로 참석자나 청중이나 진이 빠질 정도다.

공연히 폼이나 잡고 사진이나 찍어대는 여느 국제회의와는 전혀 판이 다르다.

공교롭게도 올해 행사의 주인공은 한국의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이었다.

연설후 질문도 유독 李위원장한테만 쏟아졌다.

일본기자들은 한국경제 개혁작업에 대한 소신뿐 아니라 일본경제에 대한 신랄한 공격까지도 그의 입에서 나왔으면 하고 기대했었다.

"한국정부의 실업대책은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개혁의 강도를 더욱 높여나가야 한다" 는 답변이 일본기자들이 기대했던 정답이었다.

하지만 李위원장이 정부의 실업대책 설명으로 적당히 넘어가는 바람에 김이 샜다.

반면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대통령 연설은 일본의 기대를 전적으로 만족시켜줬다.

'유럽국가들은 유로라는 단일통화체제를 구축했는데 아시아라고 못할 게 없지 않으냐, 아시아도 단일통화를 만들자' 는 그의 주장은 일본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이었다.

일본이 뒤에서 시켜서 한 말이라는 오해를 받을 만도 하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특유의 세계관을 펼치며 아시아의 어른다운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는 이번에도 서방의 금융투기를 거침없이 비판해 댔다.

중국의 실력자가 빠진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아무튼 이틀간의 이 국제회의를 지켜보면서 '이 모든 오케스트레이션의 지휘자는 역시 일본이구나' 하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토론의 주도권문제 따위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주제 자체가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일본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들일 뿐 아니라, 모든 당사국들이 일본에 목을 매고 있는 게 현실이니 달리 어쩌겠는가.

사실 '아시아의 미래' 라는 토론회 타이틀부터가 '일본의 미래' 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모임의 시작은 아마도 일본 자신의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공교롭게도 동남아 금융위기 사태를 계기로 저절로 엄청난 비중이 실리게 되어 버렸다.

일본정부가 나서서 '내가 내로라' 하며 아시아의 리더를 자임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런 방법으로 일개 신문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실력자들을 총집합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또 한가지 느낀 것은 "아, 6년째 해온 이같은 국제회의가 바로 일본식 구조조정의 현장이구나" 하는 점이었다.

구조조정이 어디 별건가.

미래의 준비에 필요한 지혜를 모으고 합의를 도출하고 실천해 나가는 작업이 아니겠나. 물론 일본 역시 수많은 국내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구조조정이란 근본적으로 세계경영의 기본전략을 통째로 뒤집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남아위기를 어떻게 다시 추슬러야 하며, 미국이나 유럽시장에 대한 전략을 어떻게 수정해 나갈 것인가 등이 오히려 더 중요한 관심사들이다.

일본의 구조조정은 이처럼 '세계를 상대로' 가 대전제다.

이런 잣대로 보면 한국의 구조조정에는 어떤 점수가 매겨질까. 우리의 구조조정은 과연 얼마나 세계를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도 취임 일성으로 국제경쟁력은 국가생존의 문제라고 역설했었다.

개혁의 피도 이미 적지 않게 흘렸고 그럴듯한 실적도 올렸다.

자고나면 비리가 폭로되고 줄줄이 수갑을 차는가 하면, 기업들에 대한 정부의 강제 통폐합도 불사해 왔다.

까짓것, 큰 줄기만 맞게 간다면야 소소한 것들은 무시될 수도 있다.

제발 좀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하다.

우리의 구조조정은 갈수록 '세계를 상대로' 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국내정치활극만 계속 흥미진진할 뿐, 바깥세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관심조차 없는 나라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