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교전 확대 맞아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남한의 비료를 실은 배가 북한의 항구를 향하고, 금강산 관광선이 예정대로 출항하고, 남한 기업의 대표들이 평양행 비행기를 타고, 남북한 차관급 회담 일정이 엄연히 살아 있는 가운데 남북한 해군함정들이 서해상에서 무력충돌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북한의 시기선택을 보자.

첫째, 국제적으로는 코소보가 세계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는 시점이다.

미국은 코소보에 먼저 진주한 러시아를 견제하는 일과, 코소보에 주둔하는 평화유지군의 지휘권을 확보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리고 미국은 문제의 북방한계선을 편의상의 경계선으로 해석해 그 북방한계선은 전쟁의 동인 (動因) 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무력충돌에 대한 국무부의 첫 반응이 신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 한국의 국내사정이다.

고급옷 스캔들과 검찰에 의한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으로 민심의 상당부분이 김대중 (金大中) 정부를 떠나고, 야당의 정치공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국민의 정부는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

셋째, 미국의 북한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페리 보고서가 곧 나온다.

북한은 늦기 전에 남북화해에 관심이 없음을 확실히 해 미국의 새로운 북한정책이 남북화해를 전제로 짜여지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리 (時利) 를 탔다고 생각한 북한은 햇볕정책에 대한 金대통령의 집념으로 미루어 북방한계선을 넘나드는 정도의 도발에 한국이 힘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을 수도 있다.

무력충돌의 확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를 사람은 없다.

지금의 소강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전열 (戰列) 을 가다듬고 다시 내려올 것이다.

소강상태를 최대한 활용하고, 판문점의 장성급회담을 포함한 모든 대화채널을 통해 무력충돌의 재발과 사태 확대를 막아야 한다.

남북한은 감정이 격앙돼 있어 선뜻 악수할 처지가 아니다.

주변 4강, 특히 미국과 중국이 나서서 싸움을 말리도록 외교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서해상에서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그리고 슬기롭게 대응하는 것 이상으로 베이징 (北京) 과 워싱턴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

4강의 힘을 빌리는 것은 한국인끼리 해결해야 하는 한국문제를 '국제화' 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은 국민정서에는 맞아도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수사 (修辭)에 불과하다.

여론도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밀어내기로 북한 경비정을 몰아낼 때는 무력충돌같은 한정된 교전 (交戰) 이라는 단계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무력충돌이 확대되면 그 다음은 크건 작건 전쟁이다.

한국의 정전체제는 살얼음판같이 취약하다.

모든 대책을 팽팽한 긴장을 푸는데 모아야 한다.

사태의 확대에 대비하고, 대응은 단호하면서도 냉철해야 한다.

정부는 여론을 경청하되 여론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햇볕정책은 최대의 딜레마에 빠졌다.

야당과 보수진영의 일제공격이 예상된다.

그러나 햇볕정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외교안보팀이 북한과의 물밑 채널을 너무 믿고, 金대통령이 햇볕정책의 성과를 서두르는 데 있다.

金대통령은 97년 대선기간중에 자신이 당선되면 1년반 안에 북한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그건 비현실적인 공약이었다.

공약대로 북한문제를 해결하라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다.

남북화해를 이루어낸 대통령으로 청사 (靑史)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망을 버리고 햇볕정책의 속도를 줄이는 것이 그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는 길이다.

우리는 북한이 한 손으로는 비료와 금강산 입장료를 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국의 해군함정에 포격을 가하는 데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그러나 진군나팔 (jingoism) 은 위험한 사태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 뿐이다.

김영희 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