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4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9장 갯벌

콧속이 맹맹할 정도로 취해서 자리에 누웠는데도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건넌방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태호는 가만히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갔다. 길거리에 사람들의 내왕은 뜸했지만, 건물에 있는 형광간판들은 꺼지지 않고 명멸하고 있었다.

몇 걸음을 옮겨 놓을 적마다 빠져나온 아파트 건물을 뒤돌아보았다. 돌아갈 때의 길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골목 앞을 지나칠 적마다 중국 특유의 느끼한 내음이 코로 스며들었다. 낮에 가 보았던 시스창 쪽을 겨냥하고 사뭇 걸어 보기로 하였다.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넜지만, 그들 숙소 근처에 있는 바이산다샤 건물의 모습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일행과 헤어진 김승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는데도 쉽게 잠들지 못했던 까닭을 그제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길가에서 빙수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 있었고, 주변의 간이의자를 차지한 젊은이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는 빈 의자를 끌어당겨 걸터 앉았다. 거리 저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장소보다 더위를 느낄 수 있는 길목을 골랐더라면 더 많은 빙수를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말고 혼자 픽 웃었다.

그러나 역시 시원한 곳에서 더 잘 팔리겠지. 빙수를 주문하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 사이에 다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의 장터에서 만나고 보았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의 좌판에서 물건을 사거나 흥정을 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던 사람은 없었다.

난생 처음 외국 땅에 떨어졌다는 외로움 탓일까. 아니면 옌지까지 달려왔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허탈 때문일까. 서울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고개를 돌렸다.

뒤편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사내가 뒤통수에 대고 한국말로 한성에서 왔느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얼른 담배 한 개비를 건네 주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사내는 금방 일행의 대화 속으로 끼어 들었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웨이하이 부두에 내린 후 옌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과 초인사를 나누었던 대개의 사람들은 담배부터 권했었다. 안면을 엄중하게 여긴다는 그들 사회의 전통적 범절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태호는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주문했던 빙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빙수는 좀처럼 테이블로 배달되지 않았다. 상인은 태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뭇 곁에 있는 아낙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빙수를 만들 생각은 아예 단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려 이십여분을 기다려서야 자전거에 실린 얼음덩이가 배달되고 있었다.

봉환형 같았으면, 애저녁에 벌떡 일어서 버렸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태호는 불빛들이 듬성듬성 비치고 있는 거리 저 쪽에 물끄러미 시선을 던진 채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시스창을 구경하는 것도 일행으로선 빼놓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거리를 구경하고 다녀 보는 것도 잊지 말라던 그녀의 충고가 생각났다.

식당이 쉬는 날에는 전철을 타고 이곳 저곳을 해질 때까지 배회하였다는 그녀의 서울 순례도 의미가 있었다는 말도 해주었다. 사소한 것이 뚜렷하고 크게 보이는 판별력을 키워 주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노천가게에서 일어나 걸었던 시간도 꽤나 길었었다.

거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다방과 노래방과 룸살롱, 그리고 술 취한 젊은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서울 한 모퉁이처럼 보였다. 그녀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그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옌지 시가지의 모습인지도 몰랐다.

꽤나 먼 거리를 배회한 것 같았는데,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은 정확히 찾아 낼 수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얼굴 전체에서 술 냄새가 확 풍기는 봉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소리쳤다.

"니 삼통 (사뭇) 어디 갔다가 인제사 나타나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