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이나모리 회장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로 통한다.

지난 59년 28명의 동료를 모아 자본금 3백만엔으로 설립한 교토세라믹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첨단기술 개발로 일관했을 뿐 아니라 미래산업으로서의 통신산업 분야에 진출하는 선견지명을 내보였었다.

초년운은 지지리도 나빴다.

중학교 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했고, 재수시절에는 결핵에 걸리기까지 했다.

대학입시에서도 원하던 명문의대를 포기해야 했다.

졸업 후 취직시험에 여러번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첫 직장인 쇼후 (松風) 공업의 월급쟁이 시절 세라믹 기술개발에 몰두했다.

상사와의 대립으로 회사를 그만둔 것이 창업의 길로 뛰어든 계기가 됐다.

그는 멸사봉공을 강조하며 스스로 실천해왔다.

그가 말하는 '공 (公)' 은 곧 회사다.

직원조회에서 "두뇌와 체력을 24시간 1백% 회사를 위해 쓰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고 말할 정도. 그는 또 회사를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간주하고 있다.

단순히 이익을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 따라서 직원은 모두 가족이며 이나모리 스스로는 대가족의 가장 (家長) 으로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교세라 직원들은 이같은 자세에 감복해 모두 이나모리 회장의 '광신도' 가 되고 만다고 한다.

그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정신이나 혼에 곧잘 의존한다.

83년 카메라회사 야시카를 합병할 때도 절에서 '내가 혹시 사심이라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 라고 자문한 끝에 '없다' 고 스스로 납득한 뒤 결단을 내렸다.

엄격한 금욕주의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가라오케를 매우 즐긴다.

애창곡은 일본의 국민가요격인 '후루사토 (故鄕)' .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일본 재계에서도 손꼽는 친한 (親韓) 인사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한.일 재계에서는 향후 양국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쿄 = 남윤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