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의 모스크바 광장] 푸슈킨 추모 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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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6일 첫 아들을 얻은 세르게이 (22) 와 이리나 (20) 는 아들의 이름을 알렉산드르로 지었다.

2백년전 이날 태어난 러시아의 대시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작명한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초등학교 5학년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 (12) .그는 대문호 푸슈킨과 성명이 똑같다는 이유 만으로 올들어 각종 푸슈킨 기념행사와 방송에 출연했다.

시인 지망생 예브게니 (33) .세상을 한탄해 한때 시를 버리고 술 주정뱅이 생활을 했다는 그는 요즘 두달째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 위치한 푸슈킨 관련 유적지와 조형물을 찾아다니며 위대했던 시인의 동상과 기념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푸슈킨 탄생 2백주년을 맞아 온통 추모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러시아 ORT - TV는 각계 각층의 시민이 직접 출연해 그들이 애송하는 푸슈킨의 시 한구절씩을 낭송하는 프로그램을 두달째 방영 중이다.

주요 도시 간선도로에는 푸슈킨의 시구가 적혀 있거나 얼굴이 그려진 입간판들이 즐비하다.

푸슈킨의 얼굴에 2백주년 기념 로고를 박은 2백여종의 상품이 초콜릿에서 보드카까지 쏟아져나와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곳곳의 기념지엔 참배객들의 꽃다발이 넘쳐난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등 정치인들도 각종 연설에서 으레 푸슈킨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시민들의 푸슈킨 추모열기에 슬쩍 편승해보겠다는 냄새 (?)가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밉지는 않다.

정치혼란과 경제난이 극심한 가운데서도 위대했던 한 시인의 탄생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온국민이 이렇게 애틋하게 기념하는 모습, 바로 이런 게 러시아를 문화대국으로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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