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노조, 사상 처음 실리파로 바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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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현대차지부(현대차노조, 조합원 4만 900여 명) 집행부 선거에서 1987년 현대차노조 창립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중도·실리파가 과반수를 넘는 지지(57.7%)를 얻었다. 24일 결선투표에서 이런 기류가 이어질 경우 강성으로 꼽혔던 현대차노조의 변화가 예상된다. 현대차노조를 전위대로 내세워 정치투쟁을 해온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도 적잖은 노선 변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차노조는 15일 집행부 선출 선거를 치른 뒤 부정투표 시비로 중단했던 개표를 21일 재개했다. 그 결과 실리파로 분류되는 이경훈(49) 후보가 1만2774표(31.1%)로 1위, 강경투쟁 성향의 권오일(43) 후보가 1만1023표(26.8%)로 2위를 차지했다. 두 후보는 과반수 득표자를 가리기 위해 24일 결선투표에서 맞붙는다. 또 다른 실리파 홍성봉(48) 후보는 2위와 불과 99표차로 3위(26.6%), 강경파 김홍규(47) 후보는 14.9%로 4위를 차지했다. 결국 1, 3위에 오른 실리파의 총 득표율은 57.7%에 달했다.

실리파가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과거에도 네 차례나 있었다. 하지만 결선투표에서 번번이 역전패당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판은 과거와 다른 구도다. 과거에는 실리파 1명이 강경파 2~3명과 대결하는 구도여서 1차 투표 때 분산됐던 강경파 지지표가 결선투표에서 결집, 번번이 역전됐다. 1차 투표에 실리파 2명이 나와 과반수 득표를 얻기는 처음이다.

◆반(反)금속노조가 이슈=이번 선거는 금속노조의 의도에 반발하는 성격이 짙다. 금속노조는 10월부터 기업지부를 지역지부 산하의 지회로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현대차노조의 경우 현재의 현대차지부라는 조직은 사라진다. 대신 울산공장은 울산지부 현대차지회, 전주공장은 전북지회 현대차지회 식으로 해체시키는 방식이다. 이른바 ‘산별노조 완성’으로 가는 마지막 코스다.

이에 대해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조합비 납부를 거부하겠다”며 반발, 상급노조인 금속노조에 대한 하극상 논란을 무릅쓰고 선거를 강행했다.

실리파는 “금속노조가 과거의 교섭·투쟁 전략을 답습, 조합원의 기대를 무너뜨렸다”(이경훈 후보), “(금속노조가) 조합원을 갈기갈기 찢는 문제점을 해소하지 않으면 현대차지부가 납부하는 조합비의 힘을 보여주겠다”(홍성봉 후보)는 기치로 표를 끌어 모았다. 반면 강경파는 “구조조정 강력 대응, 사측 개악안 원천봉쇄”(권오일), “투쟁 없이 실리도 없다”(김홍규) 등 투쟁의 선봉임을 자처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쌍용차 사태도 영향=현대차의 한 노조간부는 “쌍용차 사태가 조합원 정서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쌍용차 파업 당시 상급단체가 조정자 역할보다 노사·노노 간 갈등을 조장, 폭력을 부추겨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다는 게 다수 조합원의 시각이란 얘기다. 그러나 노동부 관계자는 “현대차 조합원 사이에 자신들이 금속노조의 대주주라는 인식이 남아 있어 금속노조와 결별하자는 분위기는 아니다”고 전했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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