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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들은 연구만 하라 행정업무는 생각도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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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재승 KAIST 교수

국내 첫 폴리에스테르 필름, 메모리 반도체 ROM, 간디스토마 치료제 개발. 이들 대단한 업적의 공통점은 국내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1970, 80년대에 이룬 성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이공계 국책연구소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대기업과 민간연구소의 활약이 전보다 두드러진 때문이다. 21세기엔 더욱더 첨단 과학기술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한다. ‘과학기술 경쟁의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공계 공공연구소들은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까. 중앙일보는 KAIST와 공동으로 세계 최고의 정부출연 연구소 세 곳의 수장을 잇따라 만나 한국 과학의 앞길을 물었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뇌공학)가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하고 수행했다.

인기 댄스그룹 ‘소녀시대’가 그들의 노래 제목처럼 ‘소원을 말해봐’라고 외치면, 대한민국 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은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많은 연봉과 훌륭한 연구환경, 기관장의 리더십, 우수한 연구동료, 그리고 잡무로부터의 해방을 꼽을 것이다. 일본 도쿄 근교 와코시에 위치한 이화학연구소(RIKEN, 이하 리켄)에는 과학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Genie)’가 산다. 지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요정이다. 연구원들은 1억원 이상의 연봉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환경, 노벨상을 수상한 소장의 탁월한 리더십, 2500명의 고급 인재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일한다. 하지만 리켄의 가장 큰 장점은 500여 명의 ‘행정 드림팀’이다. 연구원들에게 입에 혀 같은 밀착지원을 해주는 노련한 요원들이다. 말 한마디면 뭐든 대령한다. 석·박사들이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도록 도와주는 행정직이야말로 이곳 과학자들의 진정한 ‘지니’다. 덕분에 리켄은 매년 2500여 편의 논문을 쏟아낸다. 세계 7위 수준이며, 아시아에선 독보적인 1위, 정부출연 연구소 중에선 세계 1등이다.

리켄 소장은 200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노요리 료지(野依良治·71) 박사다. 그는 우수과학자의 유치와 산학협력을 거듭 강조했다.

-일본에서 정부출연연의 위상은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에 비해 어떤가.

“리켄의 위상은 최고다. 많은 연구자가 가장 선호하는 연구소다. 물론 대학보다 더 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일본 최고의 도쿄대 교수가 옮겨왔다. 일본의 정부출연연은 연봉이 대학교수 수준이며, 자유로운 연구환경이 조성돼 인기직장의 하나다. 기업 연구소보다 연봉은 적지만 신분은 훨씬 안정적이다.”

-6년 전 법인화한 뒤 연구재원은 어떻게 조달하나.

“아직 대부분 정부예산으로 운영하지만 도요타·혼다·올림푸스 같은 기업들과 산학협력을 많이 한다. 연구원들이 교수들과 경쟁해 정부의 연구지원 공모에서 선정되는 경우도 많다.”

-출연연이 산학협력을 하려면 기초연구에만 집중할 순 없을 텐데.

“리켄이 기초연구에 집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상 계주로 따지면 ‘바통 지역’에 있다. 기초과학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기업체로 기술을 이전해주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는 기업체에 기술 바통을 전해주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생명과학은 그러기 어려운 편이다.”

-법인화된 연구소가 성공하려면 우수 인재를 모아야 한다. 리켄의 전략은 무언가.

“5년 동안 일하는 계약제 연구원의 수가 85%나 된다. 박사를 받은 뒤 가장 열정적으로 뛰어난 연구성과를 내는 시기를 리켄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최상의 환경에서 마음껏 연구한 뒤 대학교수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

-료지 소장은 외국인 과학자 유치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뇌과학연구소(BSI) 소장으로 온 도네가와 스스무 MIT 교수(일본 유일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도 연구소 안에선 영어만 쓰도록 하는 등 국제화에 신경 쓴다.

“리켄의 외국인 과학자 비중은 11%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연구소가 되려면 외국인이 와서 편하게 일할 만한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아직 행정적인 문제가 많지만 조만간 개선되리라 기대한다.”

-일본 학계의 폐쇄성 탓에 국제화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우선 일본 내 학위를 우대하곤 한다. 또 외국인에겐 계약제 연구원 자리는 잘 내주지만, 종신연구원 자리엔 인색한 편 아닌가.

“얼마 전 한국인 과학자 김유수 박사가 우리 종신연구원이 됐다. 구미 출신의 과학자 중에 종신연구원은 물론, 그룹 리더가 된 경우도 적잖다.”(리켄에는 50여 명의 한국인 과학자들이 일한다. 김 박사는 첫 종신연구원.)

-리켄은 바이오공학과 나노공학, 정보·통신과학, 환경공학에 집중 투자할 방침이라는데.

“나는 새로운 학문과 기존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융합 학문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발 빠르게 새로운 학문을 지원해 성과를 내는 연구소에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융합 학문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공이 다른 학자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일하는 기회를 확대해 아이디어를 주고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연구소는 그들의 공동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리켄 창의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인터뷰·글  정재승 KAIST 교수



연구원 2500명 … 1년 예산 1조원

◆이화학(理化學)연구소(RIKEN)=1917년 설립된 일본 최대 기초과학 종합연구소. 연구원 2500명, 행정직원 500여 명, 1년 예산은 약 1조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가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를 배출했다. 이 연구소는 인공조미료, 비타민 B1, 원자번호 113의 ‘우눈트리움(Ununtrium)’원자를 처음 만들거나 발견했다.



화합물질 모양 선택 기술로 2001년 노벨 화학상

◆노요리 료지 박사=화합물질은 왼손과 오른손처럼 모양은 같지만 거울로 보는 것처럼 방향이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어느 쪽을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그는 촉매를 사용해 원하는 모양을 선택하는 기술을 발견했다. 이 공로로 미국 윌리엄 놀스, 배리 샤플리스와 함께 2001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교토대 화학박사 ▶나고야대 교수 ▶리켄 소장(200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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