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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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제9장 갯벌

"왕서방 따라 갔나?" "농담 치우고, 어른 찾아 봐야 할 거 아이가." "손씨 찾겠다고 대중없이 헤매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하고 나면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 여기 꼼짝 말고 서서 기다려. 형, 여권은 잘 챙기고 있어? 외국 나오면 여권은 목숨처럼 간수해야 돼. "

"니나 내나 외국땅 처음 밟아 보는 처지는 똑같은데, 나를 알라 취급하나?" "알았으니까, 형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에서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손씨 찾아볼게. "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열적게 서서 기다렸으나 손씨는 물론 태호조차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을 대수롭지 않게 이탈한 손씨의 방만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타나면 따끔하게 면박을 줄 심산인데, 이십여분이나 기다린 끝에 나타난 것은 태호뿐이었다. 그러나 태호는 손씨를 만나고 온 모양이었다.

"형, 손씨 말이야. 지난 밤 화투판에서 한 건 크게 건진 것 같애. " "지루한 시간 죽이자고 백원짜리 소일판 벌인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노름판을 벌였다는 말 아이가?"

"그런가 봐. 그런데 공교롭게도 손씨에게 몽땅 털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조여사였어. 하얗게 질린 조여사가 손씨 혁대를 바짝 감아 쥐고 놔 줘야 말이지. 아까 트랩을 내려올 때, 조여사를 부축해 준 것도 혁대를 감아 쥐고 놓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거야. 우리에게 줄 수당까지 몽땅 털린 모양이야. 형, 이런 일도 있네. "

"조여사가 그 사람이 노름판에서 질라이 (전문가) 인 줄 어떻게 알았겠노. 자는 범 코 찔렀다카디 조여사가 손씨를 우습게 알았다가 큰 낭패 당하고 말았네. 그런데 손씨는 딴 돈을 못내 놓겠다 이거제?" "물론 못 내놓겠다고 버티니까 붙잡고 있는 거겠지. "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드노?" 태호를 뒤따라가기로 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이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기다리고 서 있었던 출국장 근처였다.

그들이 가지고온 배낭을 넘겨받은 자동차는 이미 웨이하이 시내로 떠나고 없었다. 그런데도 조여사는 손씨를 놓아 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조여사는 중국산 깨를 구입해 귀국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중국상인에게 치러 줄 물품대금을 지난 밤 도박판에서 깡그리 날린 것이었다. 물론 지루한 시간을 화투판 구경이나 하면서 보내자는 심산이었다.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이 오가는 고스톱판이었다. 고스톱판은 그러나 한 시간도 못되어 섰다판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판이 커지는 것에 판꾼들 어느 누구의 반대도 없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만원짜리가 판을 건너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조여사는 역시 구경꾼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판이 거듭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손씨가 끼어들라는 한마디를 건네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때마침 손씨가 끼어들 것을 권유했다.

물론 처음부터 판돈을 휩쓸어 버리겠다는 가당찮은 욕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과욕이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중국을 보따리로 드나든 지 사년째가 되는 조여사가 가장 잘 터득하고 있었던 가치관이었다. 배가 웨이하이항에 도착할 때까지 오륙만원 수준의 손실을 작정하고 손씨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륙만원의 손실이 아니라 십여만원을 수습한 것은 끼어들어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본전에서 십여만원을 수습한 상태가 세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조여사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흡사 판돈의 액수를 올리자는 말이 조여사 입에서 튀어나오도록 기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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