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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출구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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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난 1년간 국제공조에 의한 세계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은 일단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금융시장은 안정됐고 세계경제는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대(大)실험은 일단 성공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경제학 발전이 이에 기여한 바 적지 않다. 또한 버냉키나 킹과 같은 뛰어난 경제학자들이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 수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도 경제학연구의 축적이 실제 정책으로 즉각적으로 응용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앞으로 맞게 될 상황 또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출구전략의 어려움이 당장 앞에 가로놓여 있다. 재정과 통화의 초(超)팽창적 운용은 세계경제를 공황으로부터 구했으나 향후 경제정책의 운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세계경제 진로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유동성 과잉에서 비롯된 위기를 전대미문의 유동성 확장 정책으로 대응한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금리를 내리고 재정지출을 늘릴 때는 시장의 환영을 받으나 조이고 줄일 때는 여기저기서 압박을 받게 된다.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서민가계의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자금조달에 쪼들리게 되는 기업, 금융기관의 막강한 로비가 있게 되고 중앙은행은 정부와 여론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 정치적 압력이 수그러지면 그때는 이미 늦었을 때다.

대공황 때처럼 전쟁에 의한 유효수요의 창출을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 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책당국은 쉽사리 재정지출 규모를 줄일 수 없고 유효수요 견인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경우 재정적자 확대, 확장적 통화정책은 상당기간 지속되게 되고 이는 결국 세계적 과잉유동성 문제를 지금보다 더욱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다시 자산가격의 상승을 부추기고 부와 소득의 분배를 악화시켜 장래 각국의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다. 선제적 조치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지난가을 이후 우리나라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확장적 재정·통화정책을 구사해 왔다. 이러한 확장적 정책은 대폭 절하된 환율과 더불어 우리나라 경제의 빠른 회복에 기여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더 선제적인 출구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부는 출구전략이 아직 시기상조라며 출구전략에 있어서 국제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경제는 확장적 재정, 금융정책의 효과로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았을 뿐이지 아직도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대공황 때나 1990년대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출구전략을 섣불리 꺼내 드는 것의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내년도 G20 의장국으로서 국제공조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미국이나 유럽이 지금 우리와 같은 경제상황을 맞고 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내 경기선행지수는 벌써 7개월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8개월간 연속 주택담보대출의 증가율은 위기 이전의 증가세보다 훨씬 높으며 시중에는 유동성이 넘쳐나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주택시장이 아직도 침체돼 있거나 적어도 위기 전에 비해 가격이 크게 떨어져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과 같은 부동산 가격의 상승 기조가 이어지면 이는 부의 분배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곧 소비 효과로 나타나 물가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

부동산 가격의 안정을 금리라는 정책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제학에서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부동산뿐 아니라 실물경기에도 찬물을 끼얹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낮은 금리수준을 지속하는 한 다른 어떤 대책을 도입하더라도 결코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확장적 통화정책이 요구됐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디플레의 우려가 없었던 우리 경제의 상황에 비춰 올해 초 한국은행은 금리를 지나치게 많이 내린 면이 있다. 지금보다 다소 기준금리를 상향조정하더라도 여전히 통화정책은 확장적 기조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가계와 중소기업이 많은 빚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정책당국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은 기다린다고 나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시경제정책의 많은 부분은 국민의 현재 편익과 미래 편익의 상충에 대해 정책당국이 적절한 선택을 해주는 것이다. 재정은 당분간 확장적 기조를 지속해야 할 것으로 보이나 통화정책은 이제 중요한 시험대에 놓였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