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울림비조 농춘화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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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두 여대생이 설레는 마음으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한 교생은 칠판에 '羅允淑'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출석부를 불러나갔다.

'김수정' 이라고 쓴 또 한 교생은 학생들 이름을 부르다 자주 머뭇거린다.

출석부에 쓰여진 한자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TV극 '파도' 의 장면들이다.

방송작가는 짐짓 한자쓰기를 옹호했나. 또는 (한자를 아는) 여주인공이 역경 (생계를 위해 술집에 나가는) 속에서도 전통적 여성성을 잃지않는 면모를 한자라는 옛것으로 상징했나. 아마 후자일 듯하다.

아무튼 미소를 자아내는 이 두 장면은 한자교육.한자쓰임의 현주소에 대해 생각케 한다.

언어생태론에 관해서는 지식이 전무하지만 이름 혹은 낱말은 대개 그 대상이 지닌 뜻을 살려 지어진다고 한다.

'살다' 라는 숭고한 뜻을 살려 삶의 주체로서 '사람' 이 나오고 사람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사랑' 으로 짓는 식이다.

상형문자라는 한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젠 한글 이름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출석부에서처럼 우리들 이름은 대개 한자로 지어졌다.

때문에 김창호 (金昌浩) 와 김창호 (金昶虎) 처럼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경우기 많다.

우리가 김창호를 부를 때 '드넓게 번영하라' 혹은 '빛나는 호랑이' 처럼 이름의 뜻까지 담아 부르자고 하면 말장난처럼 들릴까. 분명한 것은 한자를 모르는 아까 그 교생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터다.

고향 이름이나 거주지명도 똑같다.

'내 고향 풍산 (豊山)' '내가 사는 봉천동 (奉天洞)' 하고 지명의 뜻을 되뇌어 보라. 그 이름 속에서 아름다운 상상의 유희를 하는 것은 결코 허황된 공상이 아니다.

이 다소 엉뚱한 이유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일정한 수준의 한자교육은 필요하다.

이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한글을 쓰되 기왕에 쓰는 말 그 뜻을 알면 말의 구체성에 다가선다.

문제는 한문을 무작정 한글의 소리로만 바꿔 쓰는 데 있다.

일요일 아침 TV에서 '국악한마당' 이라고 하여 판소리와 민요가 울려퍼진다.

그런데 때로는 그 가사를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자막처리를 해주지만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한문투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자교육을 받아도 해결이 안되는 그냥 한문 문장이다.

판소리 가사의 한글화 작업이 당장은 어렵다고 치자. 민요는 한문 가사를 한글화하는 개사 (改詞) 는 쉽지 않을까. 고전한문서도 국역하고 대장경도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그런데 대중가요인 민요를 이렇게 방치해 놓고 국악의 대중화가 이뤄질까. 예컨대 '새타령' 을 들어보자. 물론 김세레나의 '새타령' 이 아니다.

안숙선의 소리로 들어보면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 이렇게 쉽게 시작하고선 '산고곡심무인처에 울림비조 뭇새들이 농춘화답에 짝을 지어 쌍거쌍래 날아든다' 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른다.

굳이 번역하자면 '산높고 골깊어 아무도 없는 곳에 울창한 숲사이를 나는 새들이 봄날 흥에 겨워 쌍쌍이 왔다갔다 한다' 이다.

이 우리말을 잘 간추리면 원래 뜻도 살리면서 부르기 쉽고 흥이 나지 않겠는가.

소설가 장정일은 서양노래 중 늘상 팝송을 듣다가 가사가 무슨 뜻인지 몰라 재즈에 빠졌다고 했다.

그러나 민요는 가사 없는 재즈처럼 듣는 게 아님은 자명하다.

마치 태진아나 S.E.S의 노래를 멜로디만 들으면 감흥을 못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암호같은 한문 문장은 우리 일상의 도처에 널려있다.

지하철 독립문역에는 '3.1독립선언문' 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 으로 시작하는 이 글을 어떤 학생이 알아볼까. 물론 학교에서 글의 뜻을 배워서 대강의 내용은 알겠지만 역사적 자료인 '독립선언문' 같은 것까지도 한글화 작업에 포함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자 문장을 무작정 한글로만 옮겨 놓으면 그건 심하게 말해 소리 암호에 불과하다.

어느 글에선가 '사람은 평생 여덟 수레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한다' 는 중국 성어를 '남아수독팔거서' 로 써놓고 시침을 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은 쓰는 사람간의 약속 기호다.

가리키는 바의 뜻을 공유하자는 묵시적 동의다.

그러므로 언어생활의 풍요로움은 쓰는 말의 갯수와 일정하게 비례한다.

한자 낱말의 쓰임새도 이런 점에선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쓰일 필요가 없는데 한자을 마구잡이로 쓰는 것이요, 한글을 갈고 닦아야 하는데 이를 게을리하는데 있다.

우리끼리 약속하면 그만인데 우리는 '하늘을 나는 기계' 를 '날틀' 이라 못부르고 '비행기' 라고 한다.

이헌익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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